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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리 홀(Lee Hall)이 대본을 쓴 작품 두 편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와 연극 <광부 화가들>이 그것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국내 언론계의 애정 어린 찬사들을 듬뿍 받으며 LG아트센터에서 내년까지 공연 중이고, 연극 <광부 화가들>은 5월에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후 막을 내렸다.
두 작품은 깊은 유사점을 갖는다. 모두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며, '예술' 혹은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 주인공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발레를 좋아하는 소년의 이야기라면, <광부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광부들이라는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유사한 패턴이 반복되는 듯하지만 작품의 결말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아직 어린 소년과 이미 한 가정을 끌어나가야 할 성인의 차이일수도 있다. 두 작품 모두 작품의 창작 모티프가 된 실존 인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로 인해서 줄거리가 달라졌다고 볼 수도 있다. <빌리 엘리어트>의 경우는 로얄 발레단의 댄서 필립 말스덴(Philip Marsden)이, <광부 화가들>의 경우는 애싱톤 그룹이 모티프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허나, 작가가 왜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날아오르다: 빌리 엘리어트
이미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어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사족에 가깝지만 그래도 덧붙여 보자면, <빌리 엘리어트>는 '개천에서 용나기' 프로젝트이다. 마가렛 대처의 탄광 노조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탄광촌은 파업중이다. 경찰과의 대치로 거리에서는 곧잘 난투극이 벌어지고, 생존을 외치며 노동자들은 시위를 한다. 일찍 죽은 어머니, 치매를 가진 할머니, 파업에 바쁜 아버지와 형. 어린 빌리는 우연히 발레를 접하게 되고, 발레리노의 꿈을 꾼다. 이 와중에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빌리는 로얄 발레 스쿨에 진학하게 된다. 탄광촌에서 태어난 백조 같은 아이, 빌리.
무대에서 어린 빌리의 춤을 보는 것은 가슴이 뭉클한 경험이다. 빌리라는 인물이 손에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되어 현존할 때 그 아이의 재능을 깎아내린다는 것이 몹시 '부당한' 일처럼 느껴져서 배우에 대한 코멘트를 하기가 꺼려진다. 빌리 역할을 맡은 소년 배우들에 대한 혹평이 거의 없고, 혹평을 하는 행위가 타 관객들에게 비난을 받기까지 하는 현상은 드라마의 구조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빌리가 꿈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험하기 때문에 그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에 대해 심정적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 더군다나 배우와 캐릭터가 쉽게 일치된다. 무대 위에 어린 소년이 춤을 추고 있다. 그에 대해 야유하고 싶은가. 어우, 왠지 나쁜 사람이 된 느낌이다. 객관적으로 굴면 굴수록 심장이 따끔따끔하다. 이 작품의 모든 갈등이 빌리의 꿈을 지켜준다는 이유로 봉합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그 급속한 봉합이 별 다른 어색함없이 관객에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러한 까닭일 것이다.
탄광촌의 파업은 격렬한 수준으로 무대 위에서 묘사되고, 그와 대비되어 같은 공간에서 연출되는 빌리의 춤은 힘이 강하다. 2막에서의 빌리의 개인기보다 1막에서 파업으로 인한 탄광촌 노동자와 경찰들의 대치- 함께 어우러지는 발레 수업의 춤이 더 큰 감명을 주는 것은 그러한 까닭일 것이다. 빌리의 꿈은 빌리가 처해져 있는 환경과의 대비로 인해 빛을 발한다. 빌리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발레 수업을 듣는 소년이었다면 그 아이가 얼마나 재능이 있던 간에 관객이 관심을 가졌겠는가.
바꿔 말하면, 탄광촌이라는 배경의 힘이 그만큼 크다. 온 마을이 합심하여 빌리라는 발레리노 한 사람을 겨우 키워낼 수 있는 문화적, 재정적 척박함이 이 작품을 아름답게 만든다. 하지만 빌리가 로얄 발레 스쿨에 합격함과 동시에 탄광촌과 발레 학교는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광부들은 발레와 공존할 수 없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이곳은 쓰레기 같은 곳이며, 빌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말한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으며, 이곳이 아닌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 아이가 빌리라고. 빌리는 탄광촌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라, 우연히 '생겨난' 돌연변이에 가깝다. 그 돌연변이를 짖밟지 않고,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어리고, 작고, 꿈 많은 소년이기에 아름답게 말해지는 여정이지만, 탄광촌의 모든 인물들이 발레리노가 되겠다고 말하며 고향을 떠나게 될 때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우연히 빌리가 있었고, 아마 앞으로는 없을 것이며, 그래서 빌리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와 별개로,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의 간극이 주는 괴리감도 상당하다. 10만원 가량하는 티켓으로 가난한 노동자의 생활을 들여다 보는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 대한민국의 빌리는 로또를 맞지 않는 한, 이 공연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돈지랄의 끝에서 가난을 이야기한다"는 빈정거림이 틀린 말만은 아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 공연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운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화를 향유한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를 재고해 볼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노조와 파업에 대해 보다 관대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는데 일조하기만 해도 좋으련만. 함께 공연을 본 지인은 말했다.
"탄광촌이 파업을 일년이나 해요. 영국은 참 좋은 나라군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예술을 한다: 광부 화가들
재능이 있는 빌리는 떠나고, 남아있는 소년들은 자라서 광부가 되었다. 물론, 그 탄광촌이 폐쇄되지 않아서 마을이 남아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에브리바디 해피 엔딩?! 으음? 뭐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연극 <광부 화가들>은 어쩌면 <빌리 엘리어트>에서 제기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낮에는 탄광촌에서 석탄을 캐고, 밤에는 그림을 그린다. 이들은 삶의 터전인 탄광촌을 버리지 않았고, 광부라는 직업을 그만두지도 않는다. 물론, 분열하고, 고민하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림을 그려나간다. 광부 몇몇이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애싱톤 그룹이라 칭하며 전시회도 연다. 그림을 그리는 광부들. 그들의 그림은 그 정체성에 기인하여 주목받고, 사랑받는다.
사실 이 연극은 극적 긴장감이나 재미를 주는 쪽은 아니다. 정치적 공정성의 힘은 강하나 드라마의 힘은 약하다. 갈등이 될 만한 부분이 적기 때문이다. 허나, 등장인물들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다. 탄광촌은 애싱톤 그룹과 적대적인 가치로 등장하지 않고, 광부와 화가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다. 그들은 탄광촌에서 광부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향유하며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그림으로 인하여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며, 런던 미술계는 광부화가들로 인하여 기존 화가들과는 또 다른 미술 세계를 접하게 될 것이다.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다.
물론, 이에 대해서 소소한 딴지를 걸어볼 수는 있다.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시간적, 감정적, 재정적 여유가 필요한 작업이 예술이다. 많은 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 1시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시간당 최저임금인 4110원이라는 기대 비용이 나온다. 이 돈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이젤을 사고, 물감을 사는 재료비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업실을 대여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이 작품에서는 헬렌이라는 미술 애호가 미망인이 후원자가 된다.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한 명의 발레리노를 위해 탄광촌 전체가 후원을 해야했다면 <광부 화가들>의 경우는 광부 여러명을 지원하기 위해 한 명의 부자가 있다. 보다 효율적인 것은 후자의 케이스일 것이다. 그녀에게 애싱톤 그룹을 후원하기 위한 돈은 그리 큰 위험부담이 되는 금액이 아니었을테니까. 허나, 이런 후원자는 예술가의 예술 세계를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 탄광촌의 사람들은 발레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빌리를 도와주는 것이 한계가 있었지만 그를 구속할 수도 없다. 헬렌은 막대한 문화자본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화가들의 작품 세계를 간섭하는 것이 가능하다. 직접적으로 규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본능적인 차원에서, 혹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후원자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하게 된다. 출판으로 먹고사는 작가들조차 누군지도 모르는 독자들의 취향에 전전긍긍하지 않던가.
화가 올리버는 광부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라는 헬렌의 제안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광부이기를 택한다. 훌륭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그가 런던 미술계에 들어갔다면 작품과 삶, 양쪽 모두 망가졌을 것이다. 허나, 광부 화가이길 택한 이상 평생 의문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 그림은 광부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광부를 그만두는 순간 별 가치가 없는 그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광부이기 때문에 프리미엄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이 가혹한가. 그럼 상황을 바꿔보자. 여성 예술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근대 초기는 어떠한가. 흑인 예술가가 흑인이기 때문에 그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시기는 어떠한가. 정치적 공정성이 예술 작품을 작품이 아닌 만든 이의 백그라운드까지 고려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항상 긍정적일수만 있는 것일까. 나는 이게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긍정하고 있다. 예술제도화는 분명 문제가 있다. 예술권력에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 배려하고, 격려해야만 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먼 훗날, 더 이상의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올 때.... 그러니까 더 이상 여자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 되지 않게 될때 그 예술가의 작품이 살아남던가. 더 이상 흑인이 소설을 쓰고, 춤을 추는 게 특이한 일이 되지 않는 순간이 올 때 그 예술가가 기억되던가. 그건 별개라는 점이다. 지금은 폭력과 차별이 존재하는 야만의 시대이기 때문에 가치있는 예술이고, 귀한 예술가이지만 언젠가 그 장벽이 극복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으려면 단순히 예술가의 태생적 배경만으로 부족하다. 적어도 그 사실을 인지는 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위선과 기만의 거품이 빠진다.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 양쪽 모두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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