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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다룬 공연이 그러하듯이 이 공연도 여러가지 다른 반향을 낳는 것 같습니다. 뮤지컬 동호회 오마뮤에서 저와는 많이 다른 관점으로 공연을 접하셨던 분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시각 차이가 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에 적어봅니다.

일단 김도형님의 공연평입니다.

인형의 집, 노라
이런 느낌 참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멕베쓰이후로, 이리도 강렬히 남은건 실로 간만인듯.!
그다지 새로울거 없고, 이미 알고있는 시놉인데도..

배우들의 역량과 내공높은 연출의 세련되고 쌓아가는 정공법으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바르르 반응하는...~

표면적으로는 남녀간의, 부부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
아울러,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에 관한 생각...
소통의 부재와 자신만의 파라다임으로 결국 파국으로 치닫으며.
관객은 그 살인을 용인할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그 살인을 채찍질하는데,
죽는 사람은 끝내 왜 죽는지 모르는..

참으로 섬짓했습니다.

무대위의 언어가, 내 심장을 헤집고 다시 그것이 나의 옛기억을 끄집어낼때..
지극히 당연스럽다고 생각했던 나의 고집과 schema들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배우들에 의해 담담하게 까발려질때,

그 사실적인라는게 그냥 작위적인 일상의 재현이라면 사뭇 심심했을텐데,
여과되지 않는 본능의 충동들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일상인듯 풀어놓는데..
숨이 턱턱 막히더군요..

이성적으로만 , 머리로만 이해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아니 실제로는 뼛속깊이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또한 행동들도 그러하다고 생각했던것들에 대해)
배우들이 나의 감성을 이끌어내며, 2시간10분의 공연이 20분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나를 무장해제, 팔다리의 힘을 쫙 빼놓으면서도.. 손은 움켜지게 만드는 포스란..!

안네티스머의 노라역은 물론 훌륭햇지만,^^
남편 헬머는 나의 또다른 모습을 그대로 무대에 올려놓은거 같아,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또한 일반화의 위안?을 주던, 사실적인 연기..


자칫 지루할수있는 극의 흐름들을 음악과 조명, 무대의 강약조절로 드레싱한거까지..

내일이... 내한 3일공연중 마지막날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이작품은 꼭 보시라고 추천해봅니다.
그리고, 꼭 앞자리에서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을 느끼며 보시길 ...



제 공연평에 대한 김도형님의 다른 글입니다.

미정님의 후기에 리플을 달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몇번이나 댓글로 이러저러한 제 맘을 쓰다가도 이내 지워버리기도 했습니다.

후기를 보면서, 전 내내 뭔가 불편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다, 전 화들짝 놀랍니다.

만약, 남성인(젠더로서입니다.) 미정님의 관점에서 썼다면 어땟을까?
아마 마초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거 같습니다.-.-+
이게 참 미묘한 문제같은데,
폐미니즘에 관해...미정님께서 "인형의집 -노라" 이연극에서 이 정도 밖에 표현 못했나 비평하면
또 다른 생각해볼꺼리와 아쉬움이 되지만,
또다른 상대성으로서 제가 그럼 그렇지 하고 글을 쓰면 비난이 될수도 있을거 같다는 생각..
.
.
.
다른 이야기하나..
오늘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세간의 빅 포커스가 되고 있는 연천에서의 군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왜 그들을 죽였을까..?
언론에서 앞다투어 다루는 의문점...
물리적 폭력이 있었는가..?
(상대적으로 언어적, 비행위적 폭력은 범행동기로는 약한것으로 간과되어집니다.)

-언어적, 비행위적인 학대가
물리적인 부분보다 그 레벨이 낮다고 생각하는것은 왜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정신병적인 상태도 아니었던거 같은데, 그는 왜 그리도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결론은 그의 성장배경을 모르면, 정신역동을 모르면...
뭐라 말하기 힘들다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끝을 맺엇습니다.
(암튼, 여기서 그 병사의 살인에 대한 동기를 추측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수 있는데, 그 병사의 고참들이 그 살인병사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것도 아닙니다.)

다만, 전 여기서 ..비행위적 폭력으로서 무시(NEGLECT)에 대한
부분만 끌어내려고 합니다.

다시 노라로 돌아가겠습니다.

폭력이란 꼭 실제적으로 일어나는상횡에서 오는부분이 아니라...
무시!란 이름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무시는 여기서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전 생각합니다.)

극에서 노라가 주체적으로 한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남편에게 맞추려고 할뿐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을 나와의 동등한 개체로 인정하고,
그 사람과 서로의 생각에 대해 대화할수 있는가하는부분일겁니다.

이야기의 개연성에서 노라가 집을 나가든, 남편을 죽이든...
그 인과에 대해 중심을 맞추게 되는데.
전 1막에서 보여준 남편의 모습에서
어느정도 개연성이 보여진다고 생각됩니다.

남편은 자신만의 성을 쌓습니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을때, 아이들과 대화하거나 부비부비하는 애착의 모습은 찾기 힘듭니다.
오직 손들라, 이쁘게 포즈 취하라는 남편의 요구만 투영되어집니다..
심지어, 전... 저건 알게모르게 자기가 만든 행복을 과시하려듯한 것으로 비쳐졌는지..

회전 무대의 뒷면으로 그 사진이 비춰질때 더욱 이건 허상이다라는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허상으로서의 행복이란 모습의 아슬한 줄타기, 그저 설정인...
그곳에 노라도, 아이들도..그들은 없습니다.
그저, 은행장으로 승진한 남편의 모습만 보입니다..
모든건 남편에게 그 주도권이 맞춰집니다.
주도권이란 헤게모니가 어찌보면 또다른 가부장적 가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친구의 일자리를 구해주는 부분에서, 자신의 성적매력을 능동적으로 표현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또다른 수동적 모습의 일부분으로 보여집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여기서는 남편)의 힘을 빌어서만 자기뜻을 실현할수 잇는 상황,...

폭력은 꼭 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액션을 취할때만
그 문제성이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 존재의 무시나 나의 액서서리로서 상대방을 "타자"화할때,
상대방은 상당한 자존감의 상처를 받는다는 겁니다.
자기힘으로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걸 알았울때,
얼마나 무력한지는 여러분들 모두 잘 알것입니다,,

극에서 노라는 ...
남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남편이 힘들때(심지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었을때 서명을 위조함으로서)
그가족의 먹고 입는 생활이란게 노라가 대출받고, 아르바이트하며 그 가족을 유지합니다..
근데 그부분이 무시되고, (그것은 그간 노라에 대한 존재의 무시입니다.)
다시 재기한 남편에게 포커스가 맞춰집니다.

노라는 가족을 이끌어나가는 (그리고, 남편의 극한 위기상태에서 구해내는)
어떤 개인적 욕망(가족의 안정이나 행복)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저 대상..아니 그 대상도 되지 않고,
법에 ! 어긋하는 서명하나때문에 , 남편의 포지션을 흔드는 존재로 묘사되어집니다.

행위의 측면에서, 전 계속 노라=인형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쩌면 선입견일지도 모를)
1막내내....위장된 행복줄타기, 그리고 서로 인식하지 못하는 소통의 실패...
그리고, 과시되며 서로간의 문제보다 내보이기 바쁜....
행위자체를...모두 그런것들로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이건, 겉으론 멀쩡한 가족인데, 안으로 들어가보면 뢔곡되고 뒤틀린 가족상담을 자주 하게되는
제 직업병땜에 더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2막에서 이어지는 노라의 모습역시 철저히 남편의 욕구에 총실합니다.
언뜻 보기에 스스로 원해서, 파티에 그런 설정으로 나간거 같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철저히 남편의 need입니다.

need란..
충분히 자신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때 그 need를 표현할때 자신감이 되지만..
나의 욕구가 아닌, 상대방의 욕구에 맞춘다고 생각할땐,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존감의 상처를 받게 마련입니다..

다시 폭력이란 문제로 돌아옵니다.

폭력은....충분히 남편이 아내에게 행사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제게 보여준 그들의 가정은 노라가 그저 인형이었을뿐이니까요..

인형은...
자기 발언권이 없는 그저 주인공의 소품일뿐일겁니다.

사랑받는 아내와 인형(액서사리)의 차이가....
전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라에서 부부간의 소통부재는 심각해보입니다.
어떤말을 하고, 들엇다고 해서 그게 소통은 아닐겁니다.
서로간의 감정상태에 대한 이해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소통은 차단됩니다.

근데, 노라는 막판에 자신이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우뚝 서려면..
관습적인 대상으로서- 남편(어쩌면 노라에게 역시 존재해던 그런 관습적인 모습)-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거라 추측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씬은, 남편을 죽이는 타살이 아니라,
자신안의 찌꺼기를 몰아내는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마지막으로, 사회와 개인의 문제가 어디선이 경계일까 고민해봅니다.
소셜시스템의 부재가 가져온 노라의 비극에 대해, 연출적으로 부족해보인다는것은 저역시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런 부부간의 갈등 상황에 대해....어떤 사회적인 컨센서스가 없었다는게 오히려 더 큰 사회문제로 제겐 보였습니다. (공론적으로 언급되지도 않은, 그런 숨겨진 문제지만, 저런가정이 도처에 깔린 상황이라면..)


그리고, 저의 글입니다.

도형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와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어디서 나타나는 가를 깨달았습니다.
고백하자면, 후기를 읽으면서도 저도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었거든요.
하지만, 짧은 글에서 많은 것이 드러나지는 않았고... 이번 글로 명확히 차이를 알아서 기쁩니다.

제가 잘못 판단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도형님은 토어발트와 노라의 관계를 가부장적인 남성과 억압받는 여성의 구조에 중점을 두시고 본 것 같습니다. 특히 토어발트라는 인물이 저지르기 쉬운, 기만적인 행위에 주목 하셨고, 그래서 남편을 죽이는 결말에 공감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저의 경우는 좀 많이 다릅니다. 저는 '노라'가 어떤 여성인가에 더 주목을 한 편입니다. 이 시대가 오래도록 여성을 차별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타자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동일한 가치관과 사회적 위치와 동일한 억압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성을 각기 다른 계급의 총합으로 보지 않을 때 페미니즘은 또 다른 의미의 가부장제가 됩니다. 가령, 백인 중산층 여성들에게는 육아에서 해방되고, 가정을 뛰쳐나가는 것이 여성의 자유였지만 흑인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스스로 키우고, 모성을 한껏 발휘하는 것'이 여성의 자유였습니다. 워낙에 오랫도록 백인에 의해 가정이 찢기고, 백인 아이들의 유모로서 자신의 아이를 돌볼 수 없었으니까요. 결국 여성 내부에도 수 많은 계층이 나뉘고, 여성은 또 다른 여성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노라가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유모를 통해서 가사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이미 노라와 유모는 계급이 다르고, 향유하고 있는 것들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연극이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여성의 자유를 주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조금도 노라가 어떤 여성적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가에 대한 고려가 없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중산층 이상의 백인여성을 중심에 놓았고, 1879년의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2005년까지 이끌고 왔습니다. 여성들이 최초로 자유를 이야기 할때 "여성의 독립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재정적 자립이다"라고 주장하며, 사회적으로 고분분투해서 쌓아올렸던 흐름을 연극은 담고 있지 못합니다. 이 집안에서의 부부 관계는 불평등합니다. 이것은 토어발트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재정적으로 완벽하게 예속되어 있는 여성이 갖게 되는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연극에서 계속 거슬리는 것은 사회적, 제도적 문제를 감추고 자꾸 '토어발트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것입니다. 토어발트를 자꾸 두둔하는 것은 딱히 그 사람이 예뻐서가 아니라 문제의 핵심이 이상한 쪽으로 와전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을 죽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사회 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던져야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120년 뒤의 이슈를 다루는 것이라면.... 오늘날 여성들이 고민하는 문제 쪽으로 맞추어졌으면 했던 것입니다. 남편을 죽이는 센세이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법과 제도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지 않는 한 남편을 없애려던 수 많은 여성들은 정신병원에 갈 뿐입니다. 혹은 가정파탄자로서 마녀의 낙인이 찍히던가요.

그래서 저는 이 연극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언어적 폭력과 2막에서 보이는 폭행 행위는 아무리 봐도 합리화할 수 없는 부분이죠. 하지만, '무엇이 그가 그런 식으로 아내를 다룰 수 있도록 허용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저는 역시 돈과 제도가 허용하는 가부장적인 권력으로 귀착된다고 봅니다. 힘을 휘두르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형태의 남성의 '유연함과 포용력, 상냥함'에 기대는 방식이라면 문제는 언제든지 터집니다. 이것은 결코 남편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적어도 저는 여성의 역사들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봅니다.

노라가 남편을 살해함으로서 그런 전복을 꾀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노라가 보여주었던 행위들이 결코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래서?"라는 질문이 계속 따라오게 됩니다. 이 행위가 여성의 자의식일까요, 노라의 개인적 분풀이일까요. 그녀는 '여성이라는 성별이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로 취급받는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서명 위조 사건으로 그토록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요. 오히려 남편이라는 존재만을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남편을 죽이면 해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제겐 많이 위험해 보였습니다. 여성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시기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으니까요. 그러나, 2005년에서 결혼은 여성의 의지와 선택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05년이라는 배경에서 노라의 모습은 이상하리 만큼 위압적입니다. 제 눈에는 경제적 원조를 바탕으로 그러한 타입의 가정을 꾸려가길 선택한 여성이 남편을 죽이고, 집 밖으로 뛰쳐나온 행위로 보였습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라는 변명은 그녀가 14살의 소녀와 하등 다를게 없는 지성을 갖고 있다는 뜻 외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연극은 현대의 탈을 쓰고, 센세이셔널한 결말을 끌어왔을 뿐 서양식 옷을 입은 동양 배우처럼 서걱거리며, 겉돕니다. 요즘 문화 코드가 동성애와 페미니즘이기 때문에 갖다 썼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로 여성 문제에 대해 고민했더라면 이렇게 문제 의식이 얄팍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 보자면... 저는 이 작품의 1막에 나왔다는 '폭력'에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폭력이란 주관적인 개념이니까요. 즉, 어떤 남자가 자기 여자친구를 습관적으로 '애기야~'라고 부른다고 했을 때 어떤 여성은 그것을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만, 어떤 여성은 화를 내며 항의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설정한 기준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중의 한 여성이 '잘못하고 있다'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삶의 방식에 대해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정치적 입장이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 당위적으로 부여받는 것이 아닐텐데. 제가 몹시 거슬렸던 것은 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폭력의 수위가 너무 피상적이며, 자의적이라는 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김도형님의 가치관을 지지합니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남성에게서, 동성애의 권익 보호가 이성애자의 입에서, 장애인에 대한 요청이 비장애인의 입에서 나와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정치적 공정성에 짖눌리지 않고, 여성의 내부적인 모순을 말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어떤 본질적인 모순, 혹은 거슬리게 하는 무언가가 계속 이 연극에서 느껴집니다. 상류 계층의 특정 여성이 표출하는 극단적인 이기심이라고 할까요. 그것이 아주 간단하게 '진보적인 행위'로 표출되는 것이 거북한 모양입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결국엔 편협해질거라는 경계라고 해야할까요.

모든 입장에는 give & take가 따라오는 법. 그 정도의 계산을 하지 못할 정도의 여성이라면 아이라고 불러야겠죠. 저는 그녀가 택한 보보스족으로서의 안락한 삶이 그녀의 선택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었다는 것이 한심한 것입니다. 재벌집 아들을 꼬셔서 신데렐라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인형의 집에 들어가 공주님처럼 사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남자에게 동전 한푼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는 여성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단,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어떤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는 점 정도는 알고 있는 여성이길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이 극복 가능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더라, 정도의 투정이라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애가 셋이나 딸린 여성이 이제 와서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남자가 아니었어요!'라고 말을 하는데 살짝 열이 받죠. 이 연극이 진보적인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말해진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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