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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지은이), 김경원 (옮긴이) | 이산
정가 : 10,000원 | 인터넷 서점 판매가: 9,000원 (10% 할인)

책에 대한 전반적인 요약문입니다. 매우 섬세한 논리를 구사하는 이론가라서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재촉하지 않으면 읽지 않을 것 같아 시작해 봅니다. 지속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1 . 들어가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은 가라타니 고진이 1974년 문예잡지 『군상』에 연재한 글들을 묶은 책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오히려 시대에 뒤진 것이라는 조소를 받는 시기였는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케케묵은 마르크스를 논하느냐”라는 멸시와 “문학비평가가 경제학이나 철학을 알까”라는 전문가의 무시가 고진의 저작행위에 대한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고진은 가장 기본적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고진의 이후 저작들이 같은 공식을 서로 다른 분야에 확대 적용시킨 것이라는 점을 볼 때 이 책은 고진의 기본 사유틀의 핵심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고진의 사유 체계는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프로이트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마르크스를 위의 이론에 입각하여 분석한다. 어떤 의미에서 고진은 구조주의와 맞닿아 있지만 그를 단순하게 구조주의자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은 구조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구조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기본 전제들에 대해 숙고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분석을 마르크스의 저작에 한정시키지 않고, 나스메 소세끼의 문학론에 대입하여 일본의 근대문학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는 고진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고찰하는 방식을 살펴보고, 같은 분석의 틀을 문학에 -소세키의 경우에- 어떤 식으로 적용하고 있는 가를 보고자 한다. 소세키의 경우 일본문학과 영문학의 범주 내에서 문학을 자신의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인물이며, 유입된 근대에 대해 놀랄만한 성찰을 보여주었던 문학가이다. 마찬가지로 자생적이기 보다는 외부에 의해 유입된 장르로서 근대문학 형식을 고민하게 되었던 우리문학에서도 고진의 사유 체계는 유용한 분석의 틀로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2 . 가능성의 중심에서 보는 마르크스

고진은 먼저 마르크스의 학위논문인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에서 자연철학의 차이」에 주목한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를 하나의 의미 체계로 읽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두 학자의 차이 일반을 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고찰은 오로지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에서 자연철학의 차이’에 한정되고 있다. 이전의 철학사적 통념으로서 그들의 물리학은 같은 것이어서,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물리학을 빌려왔을 뿐이며, 약간의 자의적인 수정을 가했다고만 해석한다. 데모크리토스가 원자의 운동이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데 반해 에피쿠로스는 거기에 우연․일탈․편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데모크리토스가 자연계를 결정론으로 명쾌하게 결론지으려고 했던 것에 반해 에피쿠로스가 ‘편차’를 강조한 이유는 이 편차야 말로 ‘자기 의식’, 곧 인간의 주체성이나 자유가 생겨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고진이 주목하는 지점은 마르크스가 에피쿠로스를 데모크리토스의 아류로 간주하는 ‘동일성’의 장(場)을 해체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본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하는데 마르크스는 많은 부분을 고전경제학으로부터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비(非)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론』을 고전경제학의 한 변종으로 취급한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고전 경제학이나 헤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고유성이란 그들과 명확하게 다른 부분이 아니라 거의 동일하게 보이는 부분에 숨겨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한 곳이 있다면, 그가 바로 헤겔적으로 말하고 있는 곳에서다. 요컨대 미세한 차이, 사소한 수정이지 ‘근본적인 전도’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러므로 고진은 마르크스를 ‘읽는’ 일은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 곳, 헤겔과 근접해 있는 곳에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물건은 상품이 아니다. 그렇다고 욕망이 어떤 물건을 상품으로 만든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욕망하는 이유가 그 대상이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말장난에서 상품이 상품인 까닭은 도출되지 않는다. 상품은 가치형태를 갖고 있다. 상품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가치대상성을 가지며, 이것은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스스로 비교했듯이 이것은 언어와도 유사하다. 언어는 언어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편차가 생기며, 의미가 부여된다. 마찬가지로 상품은 고립적으로 고찰될 때에는 교환가치라는 형태를 취하는 일이 없고, 그와 종류가 다른 한 상품에 대한 가치관계나 교환관계에서만 이를 취한다. 여기에 화폐가 개입되게 되면, 각각의 상품에 마치 화폐량으로 표시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 같은 환영을 부여하게 된다. 곧 화폐형태는 가치가 가치형태, 달리 말해서 상이한 사용가치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마르크스는 ‘확대된 가치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z량의 상품 A = u량의 상품 B
     〃           = v량의 상품 C
     〃           = w량의 상품 D
     〃           = x량의 상품 E


이것은 모든 상이한 상품의 상대적인 관계의 연쇄이고, 여기에는 중심이 없다. 그것은 이른바 ‘중심 없는 관계의 체계’이다. 마르크스는 일반적 가치형태 또는 화폐형태, 곧 중심으로서 한 상품의 출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한다. 고진은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진술이 전도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총체적 또는 확대된 가치형태’야말로 일반적 가치형태 또는 화폐형태를 비중심화 할 때 겨우 발견되는 ‘중심 없는 관계의 체계’라고 설명한다. 언어학에서 소쉬르는 바로 이런 지점에 도달했던 것이고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인류학에 적용했던 것이다. 고진은 “아마포의 가치가 윗옷의 사용가치로 표시된다”고 할 때, 아마포와 윗옷의 위치가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점은 ‘가치’라는 것은 없고 ‘상이한’ 사용가치의 관계가 더 정확히 말하면 ‘차이’의 유희가 근저에 있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고진이 구조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고를 했다고 볼 수 있는 점은 이렇게 ‘중심 없는 관계의 체계’를 찾아냈다고 만족하지 않고 ‘체계’와 ‘구조’에 대한 의심을 던졌다는 점이다.

랑그 체계의 경우 화폐 같은 중심은 없지만, 각각의 말에 내재적인 의미(개념)가 있다는 플라톤적인 상식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중심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쉬르는 그것을 부정해야 했으며 ‘중심 없는 관계 체계’를 취했다. 그러나 소쉬르는 이 ‘체계’ 자체가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사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구조주의자는 체계를 체계로 만드는 제로 기호를 상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초월성이며, 외관상으로만 초월론적인 것을 부정한데 불과하다. 고진은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로이트의 이론을 끌어들인다. 화폐형태에 의해 소거되어 버린 가치형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유사하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화폐=음성문자라는 모양을 취한 것에 불과하며, 경제학은 이 ‘의식’에서 출발한다. 경제학이 암묵적으로 화폐를 전제하고 있음은 그것의 반증이다. 여기서 고진은 ‘교환’에 대한 근본 의미를 탐색한다. 경제행위에 대해서 상품의 ‘등가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것이 왜 어떻게 등가형태를 취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간과된다. 화폐의 성립에 의해서 비로소 각 상품은 ‘공통의 실체’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각 상품은 원래 ‘공통의 실체’를 지닌다는 전제가 도출되게 된다. 즉, 동질의 인간노동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진의 마르크스의 가능성을 읽는 핵심이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전제이자 구조를 이루고 있는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명제가 사실은 구조에 의해서 도출되었다는 생각은 ‘내면’의 발견과도 연결이 된다. 우리는 먼저 말하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에 쓰는 것을 익힌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면(內面)이 있고, 그것이 외면화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쓰는 것일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충분하지 않은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내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면’은 문자를 갖지 않은 어린아이는 갖고 있지 않다. ‘내면’ 자체가 문자의 결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문자가 마치 ‘내면’에서 가장 소원(疏遠)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문자가 음성적 문자이고 단지 음성을 표기할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폐=음성문자를 ‘내면’, 곧 상품에 내재하는 가치에서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말한 상형문자로서의 가치형태에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월론적인 의미나 가치를 표시하기 위해 문자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자가 그것을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 화폐=음성문자 확립의 결과인 ‘의식’에 의해 덮여서 가려져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가치로서 상호 연관시키는 것은 이들 물상(物象)이 그들에게 동등한 종류의, 인간적인 노동의 단순한 물상적 외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이다. 그들은 상이한 종류의 생산물들을 교환할 때 가치로서 상호 등치시킴으로써, 그들의 상이한 노동을 인간노동으로서 상호 등치시킨다.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라는 것의 액수에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쓰여 있지 않다. 오히려 가치가 어떤 노동생산물이라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로 전화한다. 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 상형문자의 의미를 풀려고 하고, 그들 자신의 사회적 산물 -생각건대 가치로서의 사용대상들에 대한 규정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회적 산물이다-의 비밀을 탐구하려고 한다”

-위의 책, 마르크스 『자본론』재인용


소쉬르는 언어를 가치형태로 파악함으로서 ‘의미’를 파괴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의미와는 다른 말의 ‘가치’에 대해서 말한다. 예컨대 tree라는 말과 arbor라는 말과 ‘의미’는 같아도 각각의 체계(랑그)속에서 다른 말과의 관계가 다르다. 이것은 가치가 다르다는 뜻이다. ‘언어’ 일반은 어디에도 없다. 변별적인 관계인 하나의 랑그는 다른 랑그에 대해서 존재한다. 플라톤은 어떤 개념이 그리스어와 여타 언어로는 다르게 언급되는 사실로부터 개념과 음성 관계의 자의성을 지적하고 있다. 소쉬르가 말한 ‘자의성’도 그렇게 이해되고 있지만, 고진은 사실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개념’은 다국어 간에 번역이 가능한 어떤 말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지중해의 상업에서 통용되는 화폐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소쉬르가 ‘자의성’을 말할 때는 각국어가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을 뛰어넘는 ‘개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여기에는 서로 다른 체계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체계가 타자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다.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서 국가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공동주관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문화는 하나의 공동주관성이고 따라서 지각(知覺)도 문화에 의해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공동주관성은 하나의 체계이고 제도이며 또 그것은 별도의 공동주관성을 전제해야 하므로 그것들을 뛰어넘는 공동의 ‘공동주관성’이란 없다. 그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화폐’에 의해서이고, 그것이 종교적으로 ‘세계종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계화폐’는 이리하여 차이성을 완전하게 은폐시킨다. 숫자도 마찬가지인데, 화폐형태는 상품의 ‘질적 동일성과 양적 측정’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질적 차이를 추상화하여 그것들을 동일성 위에 놓을 때 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 역시 가치형태를 은폐한다.

고진은 규정되고, 전제되는 체계가 차이성을 은폐하는 현상을 문학에도 적용시킨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새롭게 읽어냈듯이 같은 방법으로 소세키의 『문학론』을 읽어냄으로서 문학이라는 거대한 전제가 간과하고 있는 차이성에 대해 고찰한다.


3 . ‘다시 짜기’가 가능한 ‘문학’- 소세키 문학론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저서 『문학론』에서 어렸을 때 한문학을 열심히 배웠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자라서 영문학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생애를 걸고 배워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문학이 존재한다. 자연스럽고, 친근한 한문학과 ‘어쩐지 그를 속이는’ 것 같은 영문학이 그것이다. 하지만 소세키는 이 둘을 ‘동양문학과 서양문학’으로 병치하지는 않는다. 소세키가 가장 먼저 의심했던 것은 영문학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는 보편성이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역사성 자체를 은폐시키는 일에서부터 성립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역사주의적 사고방식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소세키가 거부한 것은 서구의 자기 정체성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거기에는 <교환> 가능한, 즉 재구축이 가능한 구조가 존재한다. 우연히 선택된 하나의 구조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역사는 필연적이고, 선적(線的)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세키는 서양 문학에 대해 일본 문학을 내세워 그 차이나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소세키는 어렸을 적 다른 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양부모를 친부모로 생각하고 자랐다. 그는 <교환>된 것이다. 소세키에게 부모 자식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교환 가능한 것이었다. 소세키의 의문은 왜 자신은 이곳에 있고 저곳에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었다. 이미 그것은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바꾸기’라는 유희는 원래 제도의 근원에 속한다. 소쉬르는 언어를 ‘의미하는 것(시니피앙)’의 차이 짓기의 체계로서 포착했다. ‘나무’나 ‘고무’라는 개념이나 대상이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사물은 ‘나무’와 ‘고무’의 차이화 속에서 파생했다. 그러니 나무는 고무였을지도 모르고, 고무는 나무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바꾸기’는 일단 성립된 체계 속에서는 금지된다. 시니피앙 나무와 시니피에 나무는 절대적으로 결부됨으로써, ‘나무는 나무다’라는 동일성이 뚜렷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라는 관념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형이상학은 언어라는 제도와 중첩되어 있다. 나무는 고무가 아닐뿐더러 고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도’이다.

다시 소세키의 두 가지 문학이었던 한문학과 영문학에 대한 것으로 논의를 옮겨보면, 그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한문학의 익숙한 세계를 ‘문학’의 기반 위에서 대상화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영문학을 선택하고 난 뒤에 자기 인식틀의 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고진은 여기에서 회화와의 비교를 시도하는데 근대에 이르기까지 회화에서 풍경 자체가 목적이 되어 묘사된 적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풍경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감성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 풍경에 불과했던 풍경이 역사적․종교적인 주제를 밀어내고 역으로 모든 것을 풍경으로 취해 버리는 역사적인 전도(轉倒)가 숨어있을 따름이다. 물론 이 전도는 외부의 풍경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내적인 전도에 근거하고 있다. <풍경의 발견>은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는 선적인 역사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왜곡되고 전도된 시간성 위에 존재한다. 이미 풍경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 왜곡을 볼 수 없다. 소세키의 의문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영문학에 속은 것 같은 불안’이란 이 풍경 내부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미셀 푸코가 말했듯이 ‘문학’이란 19세기 서구에서 확립된 지배적인 관념이자 제도일 뿐이다. 그리고 소세키가 부정한 ‘문학사’, 바꾸어 말하면 역사주의적 방법 역시 이 시기에 성립했다. 소세키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역사주의가 스스로의 역사성(기원)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역사성을 묻지만 그것은 현재에 이르는 출생, 아이덴티티를 확증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소세키는 동양문학과 서양문학을 비교한 것이 아니며, 그 차이를 규정하려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로서는 영문학이 영문학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참기 어려웠다. 그것은 단지 지방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세익스피어가 동시대에 보편적이라고 여겨진 라틴 교양을 가진 시인들에게 경멸당하고, 그 이후에도 묵살 당했으며, 간신히 19세기 초 독일 낭만파를 통해, 그러니깐 ‘문학’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소세키는 서구에 의한 ‘문학사’ 자체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역사주의 자체를 의심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거기에는 ‘바꾸기’가 가능한, 다시 짜기가 가능한 구조가 있다. 소세키에게는 일본문학의 아이덴티티도 역시 의심스러웠다. 그는 서구든 일본이든 마치 확실한 혈통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는 그는 자연스럽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역사주의’적 사고에서 ‘제도’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문학사를 단선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다시 짜기가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세키는 낭만주의나 자연주의 등의 역사주의적 분류를 거부하고 ‘F+f'라는 공식으로 문학을 해석하려고 한다. F는 초점적 인상 또는 관념을 의미하고, f는 이것에 부착된 정서를 의미한다. 문학작품을 F와 f의 비율로 봄으로 인해 영문학이 영문학이라는 자기 동일성을 허용하는 가치의식을 전도시키려고 한 것이다.


4 . 나가며

고진의 사유의 틀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당연하다고 보이는 전제에 대한 회의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의 학문이란 데카르트가 확고부동한 절대 진리 위에서 학문을 쌓아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 ‘생각하는 나 자신’이 참이라는 점을 절대자인 신의 존재에서 연역했던 것처럼, 수없이 많은 근본 전제를 신의 위치에 두고 질문을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업 시간에 지속되게 묻게 되는 ‘근대란 무엇이며, 우리의 근대 시점은 언제인가’라는 질문도 고진에 의하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대’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동일성의 환상, 역사주의적인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회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회의를 통해서 도출되는 의미라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겠지만, 이런 식으로 전제에 대해서 숙고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고진의 사유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고진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읽은 마르크스, 소세키가 정말로 마르크스적이고 소세키적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갖게 된다. 고진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이 있다. 뛰어난 이론가인 만큼 논리적 정합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때때로 마르크스와 소세키가 말했던 것을 역으로 뒤집는 경우가 많다. 마치 정신분석에서 “당신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 방법이 진실을 드러내줄 수도 있지만 위험하다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이론가의 의도 너머를 추측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론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부분이 아닌 당연하다고 전제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에 분석하려는 텍스트 자체만으로 해석이 되기보다는 그 텍스트를 가능케 했던 서브 텍스트들을 상정해야만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의도하는 해석을 위해 이론을 오독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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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클리 06/11/20 13:00  R X
일단 글이 길어서 읽는 건 조금 널널할 때로 미뤄두고~^^(선리플 후감상)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윤리21'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있어서 몇 권 사보려고 한 게 벌써 한 2년 되가는 거 같아요. 아무튼 서양사상가들이 대접받는 철학서적영역에서 그래로 꾸준하게 나와주시는 몇 안되는 동양, 그중에서도 일본사상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빨간그림자 06/11/20 13:15 X
저는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문학의 영역에서만 봐서 <윤리21>은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재미있나요? 언제 윙클리님의 북 리뷰를 기대해도 되는 걸까요? +.+ 저는 푸코는 상당히 좋아한답니다. 명징하고, 섬세한 편이라서 이해는 편한 편이었어요. 전 권을 통해서 같은 이야기와 구조 패턴을 반복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런데 들뢰즈는 이해를 못하겠어요. 말 그대로 제가 읽을 수 없는 책이였어요. 첫 저작만 끝나면 다음 저작은 수월하게 읽는 게 보통의 이론서인데 <천개의 고원>은 첫 페이지부터 좌절. 해설서나 강의를 들으면 이해가 가능해질까요. OTL
윙클리 06/11/20 18:02 X
들뢰즈는 음...제가 영화를 좋아하다보니 영화평론글을 조금씩 읽게 되는데 이 양반들이 툭하면 라캉, 들뢰즈같은 프랑스철학을 들고 나오더라는 거죠. 도대체 뭔가 하는 호기심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이해력부족은 역시~~좌절입니다.^^ 라캉은 좀 꾸준하게 보고 있는데, 사실 좋아하는 사람은 융입니다. 프로이드, 라캉~ 이 양반들은 왠지 정이 떨어져서 ㅋ
빨간그림자 06/11/21 00:52 X
저도 융을 참 좋아해요. 그 사람의 신비주의(주역, 점성학, 타로카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담은 저작들을 특히요.

윙클리 06/11/20 13:04  R X
그나저나 그림자님은 뭐하시는 분이길래 이런 책까지^^~ 들뢰즈나 푸코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한 번에 술술 읽힐만한 책은 아닌데요. 이 녀석ㅎㅎ
빨간그림자 06/11/20 13:26 X
책 제목을 보고 유추하셨겠지만, 학순이였답니다.
전공은 비평이고요. ^^
덕분에 토할 만큼 이론서를 읽고, 또는 읽지는 않고 베고 자거나 깔고 있습니다.

06/11/20 18:07  R X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빨간그림자 06/11/20 20:54 X
감사해요. 그 마음과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되었답니다. 가끔씩 제가 불타는 용가리로 변신하죠. 주변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은 알지만, 또 이렇게 폭발을 해야 정신건강에 이로운 면들이 있어서 '나름대로의 건강한 수치'에 있다고 자위하고 있어요. 일이 고되어 보이는데 힘내시고요.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 더 밝은 모습으로 뵈어요. ^^

ashar 06/11/21 00:54  R X
어렵다야.....나중에 머리 맑을 때 다시 읽어야겠다.
빨간그림자 06/11/21 00:58 X
아, 이건 관련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은 요약이니깐 넘겨도 괜찮아.
결국 책 요약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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