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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원제: 倫理 21)
가라타니 고진 (지은이), 송태욱 (옮긴이) | 사회평론
정  가 : 8,800원, 인터넷 서점 할인가 : 7,920원(10% off)





1 . 문제 의식

윤리란 무엇인가.

2 . 칸트의 윤리를 재조명하다.

먼저 고백을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내가 칸트의 철학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다는 점이다. 대학시절에 칸트 철학 수업을 들었으나 그건 교수님이 정리해준 것을 단순화해서 이해했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학기가 지난 지금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의 『순수이성 비판』은 정말 더럽게 어려워서 본문을 보면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어 교수님이 주석을 달 듯이 요약해서 설명하는 것만 주워 듣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수박 겉핥기로 배웠던 칸트에 대한 느낌은 "생각하는 방식이 나와 꽤 비슷하다"라는 당돌한 친밀감과 날카로운 칼로 최대한 얇게 치즈를 썰듯이 사유를 하는 철학자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섬세해서 반짝반짝 금속성으로 빛나는 칼이 생각났었다. 심지어 '물자체'라는 개념을 도출할 때는 칼로 치즈를 썰듯이 나의 뇌를 썰어나간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칸트에 대해서 이러한 고백을 하는 까닭은 가라타니 고진의 『 윤리21』은 상당부분 칸트의 윤리관을 설명하는데 할애되고 있는데, 고진이 설명하는 칸트가 정설로 받아들여진 칸트 일반론이 아닐거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를 새롭게 해석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과 근대 문학을 소세키의 문학론을 통해 살펴본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 이어 이번에는 칸트의 저작들을 바탕으로 윤리에 대해서 '다시 읽기'를 시도한다. 즉, 저자의 사유 도출 과정을 살펴보건데 분명 섬세하고, 획기적이며, 주목할만한 논의지만 그의 텍스트 해석 방식이 개론서적인 정설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나는 칸트에 대해서 잘 모르고, 고진의 칸트 해석 방식이 칸트의 이론을 보다 명징하고, 정확하게 설명을 해낸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진의 사유는 '독창적'이기는 하나 '일반적'(혹은 전통적, 사회합의적, 관습적 등등의 단어를 붙일수도 있다)이지는 않을거라는 전제를 깔게 된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이 갖는 사유의 치밀함이나 독창성은 세계적인 명망을 지닌 학자로 평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철학적 사유가 진행중에 있고, 시대의 검증을 거친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 부분 거리를 두게 된다. 고진이 설명하는 텍스트에 대해 고진만큼 알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유의 정연함을 판단할 수는 있어도, 그 근거의 정합성을 구분할 수는 없다. 의심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재조명'을 하는 전복적 사유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클래식이 아닌 아방가르드일수도 있다는 점 말이다. 이 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읽는 일반 독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3 . 그리하여,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라는 것이 내 삶의 표층으로 드러나 떠들어질 때는 항상 '국가'와 관련이 될 때였다. 이라크 파병이 대표적이었다. 나와 내 지인이 함께 윤리를 두고 토론할 때는 국가 이슈인 경우였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대체적으로 윤리적인 탓이다. 완전무결한 인간은 아닐지라도 남에게 피해 안끼치려고 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면 가능하면 안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국가 문제로 전환되면 '윤리 따위는 쓸모없는 탁상공론이다, 실리가 제일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렇게 주장을 하는 개인 자체가 자기 삶에서 윤리라는 것을 허울좋은 미명 정도로 생각한다면 사유의 일관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텐데 개인 자신으로서는 그럭저럭 윤리적인 편이다. 선의, 신뢰, 효도, 봉사, 정의, 약한 자에 대한 연민, 사랑 등등의 감정에 대해 일말의 존중감을 갖고,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때때로 그것을 짖밟는 다른 사람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국가 이야기만 나오면 약육강식의 논리를 주장한다. 이런 차이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 하나 노파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적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적 도덕에 비하면 훨씬 차원이 낮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래 국가와 국가 사이란 겉치렛말이 아무리 요란해도 덕의심(德義心)은 그다지 없습니다. 사기 치고, 속임수를 쓰고, 교묘하게 속이는 등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표준으로 삼거나 국가를 한 무리로 보는 이상 상당히 저급한 도덕에 만족하고 그것에 개의치 않아야만 하는데, 개인주의의 기초에서 생각하면 그것이 대단히 높아지기 때문에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나쓰메 소세끼, 『나의 개인주의』, 본문 83p에서 재인용


국가의 도덕은 개인의 도덕에 비해 저급하다. 한가지 지적할 점은, 공리주의는 윤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경제 논리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창출하겠다는 경제적 손익관념이지 윤리가 아니다. 이걸 자꾸 윤리와 혼동을 하게 되면서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야말로 위선적이지 않은 진짜 윤리라고 우기곤 하는데 그건 언어의 정의를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즉, 신학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의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사유를 쌓아간 학문이다. 무신론을 가정하며 사유를 하면서 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범주의 정의 자체를 혼동하는 셈이다. 그건 인문학이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지 신학으로 불릴 이름이 아니다. 윤리란 최대의 이익을 꾀하는 사유가 아니다. 그건 경제다. 윤리는 공동체 혹은 개인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도 '올바르다'라고 말해지는 가치를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그 올바르다는 것은 '나의 이익'이 아닌 '약자의 이익'이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강육약식의 논리로 욕망의 논리를 전도하는 사유이다.

윤리가 가진 전복의 힘. 욕망의 구조를 뒤헝클어 버리는 역동적인 힘. 자신의 이익을 무시하고 약자의 이익을(행동 당시로는 실현이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추구하는 반자본주의적인 행동이 윤리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지점에서 칸트와 마르크스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가정하고, 끝없이 소비를 창출하게 부추기는 자본주의를 전도하게 되는 힘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공리주의'의 한계가 타자를 배제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결국 그러한 합의를 할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자들에게만 설명되는 말이다. 유럽과 미국의 공리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배제하게 된다. 전 세계 시민이 합의한 공리주의라고 할 때도 우리는 '미래에 지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타자로 두게 된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편하자고 자연을 파괴하는 셈이다. 이 대가는 고스란히 미래의 사람들이 치루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윤리란 <합의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염두에 두는 행위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것은 본디 당위로서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정치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살면 피곤하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가.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당위명제를 설명함으로서 답한다.

칸트의 본문>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악의에 찬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로 인해 사회에 어떤 혼란을 야기했다고 하자. 우선 이런 거짓말을 한 동기를 찾고, 다음으로 이 거짓말과 그 결과의 책임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 귀착되는지 판정해 보자. 첫 번째 점에 관해서는 그의 경험적 성격을 그 근원까지 밝혀 내고, 그 근원을 그가 받은 나쁜 교육과 불량한 친구, 그의 염치없고 악독한 천성, 경솔함과 무분별함 등에서 찾아본다. 이 경우 우리가 그가 이러한 행위를 한 계기가 된 원인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항에 관한 절차는 주어진 자연적 결과에 대한 일정한 원인을 규명하는 경우와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행위가 이러한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행위자를 비난해야한다. 더욱이 우리가 비난하는 이유는 그가 불행한 천성을 가지고 있다든가, 그에게 영향을 준 제반 사정이라든가, 또는 그의 이전 상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행위자의 이전의 품행이 어떠했든 그것은 무시해도 된다- 과거의 조건 계열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도 되고, 이번 행위에 대해서는 그 행위 이전의 생태는 전혀 조건이 되지 안는다고 생각해도 된다- 요컨대 우리는 행위자가 이러한 행위의 결과 계열을 스스로가 완전히 새롭게, 스스로 시작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자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이성의 법칙에 근거한 것이고, 이 경우 우리는 이성을 행위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이 행위의 원인은 위에서 말한 일체의 경험적 조건과 관련시키지 않고 그의 소행을 실제와는 달리 규정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본문 71~72P에서 재인용


고진의 해석>
여기에 범죄자 한 명이 있다고 하자. 그의 범죄에는 다양한 원인(사회적인 것을 포함해)이 있다. 그 원인들을 열거해 나가면 그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고, 따라서 책임이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변호나 변명에 격분하고 그 범죄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가 생각하는 '자유'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원인을 묻는다는 '이론적인' 관점으로부터는 자유도 책임도 나오지 않는다. 칸트의 생각에서 보면, 그 범죄자의 책임은 인과성을 괄호에 넣었을 때 즉, 그가 자유로울 때 생겨난다. 사실상 그에게 자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자유롭다고 그렇게 간주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의해 존재한다. 그것은 자연필연성을 배제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나는 앞에서 뒤상이 변기를 미술전시회에 전시한 일에 대해 말했다. 그 경우, 그는 그것을 예술로서 보는 것, 즉 일상적 관심을 괄호에 넣으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미술전시회에 놓여졌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미술로서 보라고 명령한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유(자기원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서만 존재한다. 칸트는 자유란 의무(명령)에 따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명령에 따르는 것은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명령이 공동체의 것이라면 그것에 따르는 일은 타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의무는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의무다. 그것은 타자에 대해서도 들어맞는다. 도덕법칙이란 "너의 인격 및 모든 타자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복종은 인과성에 속하고, 따라서 타율적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워지라는 의무란 사르트르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 본문 200~201p


이것은 실존주의적인 사고방식, 즉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나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치열하게 삶에 대해 투쟁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망은 사실 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 모든 욕망의 구조를 탈피하여 폭압적 구조 밖에서 세상을 응시하며,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구조를 전복하는 힘. 폭력과 불의를 강요하는 힘에 저항을 꾀하는 행위가 윤리이다. 윤리적으로 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굳이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동물은 참 희한하고, 다채로워서 온갖 손해를 감수하고 굳이 그렇게 살겠다는 인간들도 있는 법이다. 하나 뿐인 자신의 생을 윤리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다. 나는 종종 그런 자들의 연대를 책에서, 거리에서, 인터넷에서 본다. 자기 나라의 국경에만 국한되어 사유하지 않고, '세계시민'을 꿈꾸며, 현재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타자까지 고려한다.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사유를 한다. 윤리란 단순히 답답한 족쇄가 아닌 시공간의 스케일을 엄청나게 확장하여 통찰을 하게 하는 전복적이며, 유쾌한 사유이기도 하다.

4 . 세계시민으로서의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를 엿보며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인이다. 그러면 세계시민이 될 것을 주창하는 고진이 어떻게 그 사유를 전개하는가를 따라가 보자. 먼저 그는 일본인의 윤리적 특징에 대해 고찰한다. 일본에서는 아이가 잘못을 하면,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전통이 있다. 자식의 잘못에 부모가 책임을 지고 자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고진은 이것이 동아시아적인 윤리관인가를 궁금해 하며 중국과 한국을 살펴본 결과 일본만의 특수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고진은 전범 국가로서의 일본, 즉 일본이 패망했을 때를 생각한다. 일본의 윤리적 특수성이나 전쟁에 기여한 천황의 과실을 생각했을 때 국가의 아버지격인 천황이 죽거나 물러나야만 했다.(패전 당시 일본에서는 천황의 사퇴에 대한 주장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내외 정세에 의해 책임을 지지 않고, 천황이 그대로 유지되게 된다. 여기에서 일본인의 윤리에 왜곡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즉, 일본은 전범을 책임을 져야만 했던 사람에게 면책을 부여하게 됨으로서, 영영 책임을 질 사람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대체 옛날에 일어난 전쟁을 우리보고 어쩌라는거야'라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책임을 져야할 사람을 꼽아보자면 천황이다. 그런데 그조차 책임지지 않았던 일을 평범한 일개의 시민인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라는 의식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일본인의 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윤리적인 과오를 저지른 일본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다. 많은 일본인들이 '전범재판은 승전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단지 우리가 힘이 없었을 뿐이지 윤리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윤리란 당위이며, 국경의 범주를 넘어 세계 시민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것이 21세기의 윤리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진의 주장이 자국민에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고진의 사유가 보여주는 놀라울 만큼 강력한 자기 반성과 통찰의 힘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경계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울림을 주며 다가온다.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실천하는 지성의 힘을 본다. 윤리가 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돈이 그렇고, 명예가 그렇고, 권력이 그렇듯이 윤리 역시 한정된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힘을 뻗치고, 인생의 궤도를 바꾼다.


[뱀발]
국가의 윤리에 대해 그것이 허울좋은 미명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이율배반에 대한 예시 하나.
우리는 공식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행위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
정말로 국가간의 약육강식 논리를 신봉한다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는 게 현명했지'라고 순수하게 인정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우리나라가 실리를 위해 이라크 파병 따위를 했던 행위에 분노할 일이다.
사유의 일관성은 의견을 주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거라면 부디 침묵하기를.


             관련 리뷰
라임님의 <윤리21>, 가라타니 고진
cklist님의 윤리21 / 가라타니 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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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pie 07/08/16 10:55  R X
툭눈이가 자기 블로그에, '제일의 우선순위가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이 무섭다'고 한 글을 보고 깨달았는데, 나는 '제일의 우선순위가 사람의 목숨이 아닌' 사람이더라 ㅡㅡa 그렇다면 나는 윤리적인 사람이 아닌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이 꽤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_-a.

사람의 목숨만 놓고 보자면 내 생각은 이래.
국가적 맥락에서 인간 윤리가 저하되는 것은, 인간의 질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지. '나'라는 개인 차원에서 보면 '내 목숨'과 '내 가족의 목숨'은 바꿀 수 없는 단일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절대적이지만, '국가'나 '사회집단' 차원에서 보면 '나'는 없어지고 '인구1'이 되니까 가치가 떨어지잖아. 더불어 대개의 경우, 집단에서 배제되는 조건에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리는데 - 가끔 그 배제조차도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말 하는 사람도 있더라(나도 가끔 그 의견에 동조한다).

그런데 이게 또 국가 대 국가라는, 보다 큰 집단의 관계가 되면 - '인구1'에 '한국'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붙여보자 - ''한국'인구1'은 ''일본'인구1'보다 ''한국'인구2'에 친근감을 느끼다보니 ''한국'인구1'에 대한 가치의식이 생기는 거지. 이상적으로 보면 이 것은 다시 '세계인구1,2'로 통합되는게 옳겠는데(이런게 이성적 윤리적 사고?), 아직 이런저런 요건으로 이질성이 동질성보다 더 크다보니 그게 안 되는게 아니겠어. 저 이율배반적 태도는 이성적 인식 확장의 문제이겠는데, 그렇다는 건 개인적 차원이나 국가적 차원이나 결정하는 건 비슷한 윤리의식이라고 생각해 나는 .... .

... 음. 근데 '윤리'와 '인본주의'와 '정치적 공정'은 어디가 어떻게 다른 개념인 것일까(정치적 공정, 제대로 쓰이는 표현 맞나? 검색해보니 안나오는데;;) ? 그리고 과연, 사람의 목숨은 인간윤리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명제인 것일까? 나는 ... 개인의 목숨보다 집단의 질적 향상(예, 이상주의에 구멍투성이인 명제인건 잘 알고 있습니다=_=)을 보다 상위가치로 두는 인간이라 ㅡㅡa.
빨간그림자 07/08/16 13:26 X
음, 다소 구분이 필요한게 아닐까 싶어. 제1의 우선순위가 사람의 목숨이 아닐수도 있다고 봐. 그런데 이 논의에서는 '누구의 목숨인가'를 구분하는게 중요하다고 봐. 더 넓게 보면, 어떤 생명의 목숨인가의 문제일수도 있고 말야. '인간이 절반으로 줄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날까'라는 맥락도 자연의 목숨을 현재 인간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생명중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테니깐. 혹은 어떤 사람을 희생시켜 다수를 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중시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거야.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는 것도 '누구의 목숨'을 중요시하는가의 문제에 해당하겠지. 목숨의 중요시 문제와 윤리를 등가시키기는 힘든 것 같아. 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는가가 다를 뿐 우선순의를 두는 행위 자체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거든.

그리고 나로서는 모든 사람들은 제법 윤리적이라고 생각해. 윤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딱히 어렵지 않은 시기,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말야. 전시였다면 '제법 윤리적으로' 살아가기도 힘들겠지. 국가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을 최소한 방관하거나 침묵하게 될테니깐 말야. 한마디로 개인적 윤리가 그렇게 높은 것은 그걸 지키는게 그리 어렵지 않은 환경 때문이라고 봐. 자신의 이익이 달린 상황에서 개인이 그렇게 쉽게 비윤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고 말야.

국가적 맥락에서 윤리가 저하되는 것에 대한 과정? 사유의 매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은 흥미롭게 잘 읽었어. 지역적, 성별적, 생물학적 친밀성으로 인해서 사유가 왜곡된다면 그건 윤리적인게 아니라는게 이 글의 논지라고 봐. 우리나라 국민이니깐, 같은 성별이니깐, 같은 인간이니깐 동조하게 되는 거라면 말야.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고 인간으로서만 행동할 때 가장 저열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 음, 나도 이 점은 동의해. 한마디로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치밀하고, 엄정한 사유가 필요한 것 같아. 사고의 스케일을 굉장히 넓혀야 한다는 것이잖아. 장기적인 안목으로, 적어도 100년 앞을 생각하는 식으로 사고를 해야하는 것이라고 보이거든. 그렇게 따지자면 '무지가 악(=비윤리)를 낳는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기도 해.

<정치적 공정성>은 어떤 의미에서 give & take인 것 같고, 인본주의란 인간의 생물학적 테두리 내에서 윤리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거라고 생각해. 생태주의가 때때로 인본주의와 충돌하는 것을 보면 말야.

뱀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네가 중요시한다는 집단의 '질적' 향상이라는 것에는 범주가 빠져있는데 무엇의 질적 향상인거야? 집단에 속한 개인의 경제적 효용성의 향상?(업무 능력의 향상 같은 생산성의 향상말야) 윤리적 향상이나 정서적 향상은 아닌 것 같고. 집단에 속한 개인이 '보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린다'라는 의미의 사회복지적 향상도 아닌 것 같고.

뱀발2] <사람의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시 되어야 한다>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성립되는 명제는 아니라고 봐. 실례가 얼마나 많은데. 지금 탈레반에서도 그걸 보여주잖아. 한마디로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가치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가치라고 봐. 근데 통계적으로 봤을 때 인류 전체의 60% 이상이 동의하는 가치 명제이기에 인간 전반에 확대 적용하는 것은 아닐까.
magpie 07/08/17 13:44 X
>> 으응 나도 첫 글을 쓴 후에 곰곰 생각해보았지. 네 말마따나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치밀하고, 엄정한 사유가 필요한 것 같"다는 의견에 십분 동의해. 나도 사고의 치열함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무튼 순서대로 말하자면, 저걸 쓰면서 내가 생각했던 질적 향상은 '정신적 육체적 향상'이었어. 정신적으로 보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신체적으로도 강건한 집단이 되기를 바라는 거지. 근데 이게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 이건 당장 '다양성'이라는 가치와 충돌하거든 ㅡㅡa. 향상이라는 건 즉 도태 내지 열등을 전제하는데, 극단적인 다양성은 그것(도태 등)까지 아우르게 되니까. 언제나 이 부분에서 나는 결정적인 한 걸음을 망설이게 되더라.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신체적 강건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정신지체자의 어디까지를 인간의 범위로 인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 꽤 회의적인 입장이야. 눈에 보이는 신체구조가 동일하다고 해서 그를 나와 동등한 개체로 인지할 수 없다는 거지. 내가 생각하는 ‘정신지체자’란 ‘개체로서는 사회활동이 불가능한 지능장애나 정서장애가 있는 자’로, 중증 지능장애나 고도의 정신질환, 그리고 중범죄자-예를 들어 연쇄살인범이나 연쇄강간범-이고, 후천적으로 (질병이나 외상으로) 장애가 생긴 거라면 모를까 선천적으로 이상이 있는 이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출산을 제한하는 것을 지지해. 그런데 직관적으로는 쉽게 나오는 저 사고의 끝이 어찌나 지지부진한지, 저들의 어디까지를 ‘인간군집의 다양성’으로 인정할 것이며 어디서부터를 ‘인간집단의 병’으로 인지하고 배제할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답이 없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예로 들지 않는 한, 나는 저와 같은 논지로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을 거야. 금 간 유리잔 같이 빈약한 사유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화제가 나왔을 때는 꽤 삐딱한 태도를 보이겠지.

“우선순위를 두는 행위”라.. “윤리”를 ‘동 시대의 사회 구성원이 공동으로’, “우선순위를 두는 행위”로 정리하면, 윤리성을 잴 때 ‘우선순위를 두는 행위’의 치밀함과 엄정함, 정연함과 일관성 같은 것을 도마 위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은걸(이 일관성과 정연함을 획득하기 위해 항상 “철저한 이성”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게 재미있는 점이지만 - 그런 예외적인 자들은 논외로 하자;). 그러면 <사람의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시 되어야 한다>는 가치명제는 ‘동 시대의 사회 구성원 공동의 우선순위'에서 몇 위쯤 되는 것일까? 요즘은 절대적인 1위의 명제가 없는 시대니까 - 비록 네 말마따나 요즘이 윤리적이기 쉬운 환경이긴 해도(근데 공동가치가 대중적이라는 거야 대중이 무비판적이라는 거야?) - 모르는 사이에 무엇을 최고 가치명제로 할 것이냐를 놓고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빨간그림자 07/08/18 20:27 X
너의 '인간'의 범주는 매우 좁은 것 같아.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라는 종족을 '우생학적'인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상위에 드는 범주를 '순수한 인간'이라는 것으로 칭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우생학적인 사고방식을 현실적으로 적용했을 때 나타난 폭력의 역사적 사례가 있었던 까닭에 네 사유도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일테고. 내가 보는 인간은 그보다 훨씬 넓은 범주이긴 해. 중증의 정신지체나 선천적 이상 질병의 경우도 나는 종(種)의 범주 내에서 긍정해. 어떤 생물이든 그 종 내에서는 유전적인 도태나 이상이 나타나는게 필연적이라고 보거든. 그러니깐 내겐 그 모든 사람들을 모두 합쳐서 인간인거야. 종 자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우월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 100이라는 표본 집단에서 우월한 10을 추려낼 수는 있어도 100자체가 진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 인간이 여전히 진화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음, 그러면 진화의 다음 단계는 인간이라는 종이 아니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네가 제1의 가치로 추구하는 명제가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나야 워낙에 지향점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긍정하는 편이니깐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일단 동조를 하겠지만, 어떤 이는 '지지리도 말을 안듣는' 적대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구나.

우선순위를 두는 행위를 놓고서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다'가 몇 위인가를 측정, 판단, 추측해 보는 행위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림잡은 통계치를 내는 것도 힘들 것 같고. 단지, 그에 역행하는 행위를 했을 때 사회에서 가하는 억압, 처벌, 반발의 강도로 역짐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푸른툭눈 07/08/17 01:00  R X
내가 제일의 우선순위가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런 저런 이유로 탈레반에게 붙잡힌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충격을 말한 것이었어.

그 중에서도 제일 기분이 나빴던것은 세금문제를 내세우며 돈이 아깝다는 것이었고, 난 이게 왠지 박정희 독재시대의 경제발전 때문에 민주주의를 죽이던 것에 대한 옹호와 연관되어졌거든

물론 독재시절에 민주주의를 위해 힘쓰다가 돌아가신 분들하고 지금 탈레반에 붙잡힌(혹은 살해당한) 분들하고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 죽음 혹은 그 시대의 억압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돈이란 것이 제일 마음에 안든다.
빨간그림자 07/08/17 10:40 X
그런 네이버 댓글스러운 논리들은 말하는 사람 자체가 감정적으로 격양되어 있는 느낌이 들어. 화풀이라던가, 짜증의 느낌이지 '의견'이라는 생각이 안들거든. 적어도 사람 목숨보다 돈이 중요하다고 말하려면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정도의 신념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러지 못하거든. 명예훼손죄로 형사법에만 걸려도 피해자 가족들을 찾아가 무릎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할 타입이니깐.(실제로 누군가가 탈레반 악플로 경찰서에 출두하게 되자 그랬더구먼) 바람의 방향이 조금만 바뀌어도 딴 소리를 한다면 그건 <의견>이 아니지. 사유도, 사고도 아니고. 그냥 감정의 배설인게야.

나로서는 이번 사건 자체에 대해서 국민들이 굉장히 짜증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피해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던간에 '봉사자들이 잘못했다'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니깐. 실제로 멍청했고, 무례했고, 어이없는 일을 하긴 했지. 그 짜증을 예의와 사회화된 관습과 이성으로 꾹꾹 눌러참느냐, 아니면 악플로 표출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겠지. 악플러도 자신의 행위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거라는 예상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봐. 이 사람에게 결정의 권한을 준다면 '세금이 아까우니 구출을 안하겠다'라는 말을 하진 못할거야. 익명의 한 사람이고, 면책이 주어지니깐 지금 자기 입장에서 짜증을 표하는 것이겠지.

라임 07/08/17 17:49  R X
글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정연한 리뷰를 쓰셔서 감탄했습니다. 고진의 논의가 갖는 실천적 지평 중에서 제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타자의 범주를 과거와 미래로까지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대체 이게 뭐지?'라는 어리둥절함으로 남아있지만요ㅋ

'윤리'와 '인본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조심스레 제 생각을 남겨보면, 적어도 칸트적인 사유에서는 '인본주의'이기에 '윤리'인 것이 아니라 '윤리'는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적 형태를 띌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나아갈 것 같습니다. 고진이 윤리학에서의 칸트의 전회를 평가하면서, 윤리가 '행복'이나 '선악'에서 출발하지 않고(집단의 질적 향상은 '행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라는, 통용되는 도덕률은 '선악'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유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데에 있으니까요. 칸트의 윤리학이 형식주의로 비난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칸트의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본주의의 규범이 아니라, 즉 그의 윤리학 체계 내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칸트를 잘 몰라서 그게 뭔지는 궁금할 뿐이지만요^^;; 고진도 뭐라고 적지는 않았고...

하지만 칸트의 윤리가 요즘 재조명을 받는 이유는-아렌트나 하버마스 식으로가 아니라-, 그것이 자유이든, 순수형식이든 간에 규범과 공리라는 낡은 사유항을 넘어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트가 경험론에서 합리론을, 그리고 합리론에서 경험론을 읽어내고 그 둘을 넘어서고자 한 것처럼 공리에 규범이, 그리고 규범에 공리가 작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칸트적 사고가 절실한 것 같아요.

빨간그림자 07/08/18 20:30 X
윤리가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적 형태를 띌 수 밖에 없다는 해석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저는 '자유'라는 가치 자체가 인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가치이거든요.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필수불가결하게 인간임을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고진이 자유를 말하면서 실존주의 철학을 끌어들이는 것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이라는, 훨씬 더 강력한 인간 자체로서의 당위를 설파하고 있다고 보여요. 사실 저도 잘 몰라서 제 깜냥으로 파악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어요. ^^;;

Albireo 07/10/19 10:10  R X
간만에 들어왔더니, 뭔가 어려운 게 있어 -_-;;
유심히 읽다가 악! 소리 질러 버렸네..
요새들어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건데, 너무 단순 명료한 것만 좋아하는 거 같아.
뭐랄까... 주워 먹는다는 느낌? 아무래도 심각한 것들만 모아서 책을 읽어야 겠어. 내 사고의 수준과 범위가 계속 줄어들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어. 에씨...
빨간그림자 07/10/25 11:47 X
복잡한 세상, 치열하게 살다보면 에너지 소모를 다른 곳에 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아.
사고의 범위가 줄어드는 위기감, 음... 맞아, 그거 좀 무섭지. ㅠ.ㅠ

논외 08/01/09 23:37  R X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뇌에서 자유의지라 불리울 만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장을 뒷바침하는 실험결과들이 브레인 사이언스 분야에서 나오고 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는,자유의지의 물리적 실체를 찾으려는 시도에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아직 결론내리기에는 성급하다. 하지만 윤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브레인 사이언스는 한 번 맺어봄직한 인연이란 생각이다. 한 때 양자역학을 열정적으로 소비했던 철학자들이 브레인 사이언스를 사기위해 병원으로 병원으로 달려갈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경제학과 정치학을 같은 평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소비자로서 훌륭한 aproximation이란 생각이다. 또한 정치경제적 선택에 대한 윤리를 고민하는 것은 의미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경제적 선택에 대한 윤리의 잣대 또한 정치경제적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고로 그러한 윤리 또한 정치경제적 범주 내에서만 의미있다고 본다. 윤리학이 일반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빨간그림자 08/01/10 04:35 X
논외님, 글을 남기신 분이 누구인지 제가 짐작은 하지만... 일단 이 블로그에 손님으로 방문하신 이상 존칭은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상호합의 내에서 말을 놓는 지인의 범위가 아닌 이상 말이죠. 웹에서 3인칭 어미를 통한 논쟁이 보통 쌈박질로 변질되는 바, 이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이니 너그럽게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윤리학이라는 부분은 '정의'가 필요한 명제입니다. 즉, 논외님이 이야기하시는 언술은 논외님의 정의에 입각한 윤리학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와는 다른 의미인 것이죠. 제가 충분히 고진이 말하는 윤리가 왜 정치, 경제와 상충하는 영역에 존재하는 당위로서의 가치인지 요약을 했으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윤리 또한 정치경제적 범주 내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주장을 하시려면 윤리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그 정의 안에서 명제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요. 고진이 이야기하는 윤리학과 논외님이 이야기하시는 윤리학은 서로 다른 층위의 개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뱀발> 이리 만나니 반갑습니다, 꺄아. >.<

논외 08/01/10 17:41  R X
윤리를 정의하고 윤리를 논의해야 한다는 명제가 옳은지 의문.
윤리를 정의하기 위해선 윤리를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우리에게 존재해야하는데 이러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
'형이상학으로의 회피가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빨간그림자 08/01/10 17:46 X
'윤리'란 추상적으로 도출하는 공동체의 함의가 담긴 가치이기 때문에 정의를 하고, 논의를 해야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과 악, 미와 추를 공통 합의로 논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수학과 과학은 증명과 실험 결과로 도출이 되지만 위의 관념적 가치들은 말 그대로 언어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합의를 해내는 가치니까요.

객관적 시선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질문의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질문의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대로 회피나 회의에 머무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방식은 몹시 쉬운 방식입니다. 생각을 안해버리면 되는 거니까요. 회의와 반성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사유하고, 도출하려고 노력하는 지성사의 흐름이 인류에게 존재해 왔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논의하고 싶은 대상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정신'이지 '한계를 알기 때문에 멈추어버리는 정신'이 아니거든요.

논외 08/01/11 09:44  R X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은 존재하는지 의문 시 되는 것을 증명하기 어려운 용어를 도입 또는 도용하여 설명하려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라 생각.
기는 존재하는가가 기에 대한 많은 의견들을 비판 수용하기 전에 이루어 져야 하듯이 윤리란 존재하는가가 윤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이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공동체의 함의라 함은 이미 윤리가 정치경제적 선택임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임.
빨간그림자 08/01/11 20:20 X
1. 윤리학이라는 부분은 '정의'가 필요한 명제입니다. 즉, 논외님이 이야기하시는 언술은 논외님의 정의에 입각한 윤리학입니다. <중략> 윤리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그 정의 안에서 명제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요. 고진이 이야기하는 윤리학과 논외님이 이야기하시는 윤리학은 서로 다른 층위의 개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 '윤리'란 추상적으로 도출하는 공동체의 함의가 담긴 가치이기 때문에 정의를 하고, 논의를 해야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과 악, 미와 추를 공통 합의로 논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수학과 과학은 증명과 실험 결과로 도출이 되지만 위의 관념적 가치들은 말 그대로 언어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합의를 해내는 가치니까요.

3. 객관적 시선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질문의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질문의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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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제가 이미 반복했던 문장들입니다. 의미 전달이 되지 않고 있다면 논의는 여기서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논외님의 논지를 정의해 볼까요.

1) '윤리학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
2) 구체적 범주화로서의 정의는 필요하다 -> 정의를 내리는 행위에 대해서 논의가 필요하다.
3) 윤리란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가치가 아니라 사회 합의적이며 당위적인 가치이다 -> 윤리가 실재 존재하는 가치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사회 합의적이며 당위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것은 아닐텐데요. 이건 '윤리가 존재한다'라는 차원의 논의가 아닙니다. '기'와 같은 과학적 사물이나 실재의 논쟁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동양의 '예(禮)'입니다. 예가 실존하는 것이냐고요? 이건 행동으로서의 규범입니다. 존재론과 연결되는 가치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에 따른 논증을 제게 제시하십시오. 논외님께서 윤리라는 것을 '예'가 아닌 '기'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계신다면 저와는 다른 사고 궤적을 걷고 계신 겁니다. 저에게 '기가 존재하는가'는 중요한 테제이지만 '예가 존재하는가'는 성립되지 않는 명제입니다. 예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외 08/01/27 16:29  R X
"1. 윤리학이라는 부분은 '정의'가 필요한 명제입니다. 즉, 논외님이 이야기하시는 언술은 논외님의 정의에 입각한 윤리학입니다. <중략> 윤리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그 정의 안에서 명제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요. 고진이 이야기하는 윤리학과 논외님이 이야기하시는 윤리학은 서로 다른 층위의 개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윤리란 시간과 공간에 무관한 행위규범 또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 및 메카니즘이 정성적,정량적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기술된 행위규범. 윤리학이란 이를 연구하는 학문의 한 분야.
이러한 윤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 또는 최소한 이 시대 의미있는 논의의 주제로서(두 번째의 정의를 염두하여)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제기였음.
한편 이런 원론적인 윤리의 정의와 고진의 정의가 다른 것이라면 첫째 학문적으로 실질적 고찰이 가능한 범주 설정을 위해 가정이 내포된 정의일 수 있는데 이 경우의 정의는 순수한 정의라기 보다는 고찰 영역의 선포일 것이며 원론적 정의에 대한 포기가 아니므로 원론적 정의와 층위가 다르다고 볼 수 없음. 둘째 사고 시스템(예를들어 플라톤적 사고방식, 구조주의적 사고방식, 양자역학적 사고방식 등등)의 전면적 전환과 이의 적용으로서의 윤리, 윤리학이라면 윤리의 정의가 전환된 사고 시스템과 함께 살펴야 할 핵심이라 할 것인데 본문 및 예의 답글을 보건데 고진의 의견은 의심되지 못하고 방치됐던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석일 뿐 윤리, 윤리학 자체를 바라보는 사고 시스템이 원론적 정의의 그것과과 다른 층위의 것이라고 볼만한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음.

"2. '윤리'란 추상적으로 도출하는 공동체의 함의가 담긴 가치이기 때문에 정의를 하고, 논의를 해야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과 악, 미와 추를 공통 합의로 논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수학과 과학은 증명과 실험 결과로 도출이 되지만 위의 관념적 가치들은 말 그대로 언어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합의를 해내는 가치니까요."

윤리, 선과악, 미와추는 공동체의 함의가 담긴 가치이다.
공동체의 함의가 담긴 가치를 해석한다.
윤리, 선과악, 미와추를 정의한다.

윤리에 대한 공동체의 함의를 해석함 : 윤리를 정의함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가 투표에 참가하는 유권자처럼 실재하는 집단으로 상정된 개념이라면 윤리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함을 인정하는 것일 테고 그 때의 윤리란 문화 기술과 다름이 없으며 기술된 문화를 논의할 때 문화 기술 자체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는지 의문.
한편 공동체가 실재가 아닌 가정된 개념이라면 경제학에서 소비자의 경제적 선택 원칙,패턴을 가정하고 이에 따라 연역적으로 경제 지표를 도출하고 논의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인데 이 때에도 경제,경제학의 정의 자체가 중요하고 선행되야할 논의라는 얘기를 듣지 못함.

"3. 객관적 시선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질문의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질문의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 또는 일반적 시선이 우리에게 존재할 없음이 증명된 분야도 있음.
-5차 방적식 이상의 일반해는 존재하지 않음.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해답만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자연의 모든 것을 모두 정확하게 알 수 없음.
(불확정성 원리의 한 표현.)
-내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다는 명제는 거짓이다.
즉 100%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양자역학의 확률적 존재의 한 표현 - 물질파, 쉬뢰딩거의 방정식)

옮겨적음에 객관적이라는 말과 일반적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했는데 이는 제 글의 일반적이란 말을 주인장이 옮기실 때 혼동하신 것으로 생각되어 그런 것이며 일반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음 또는 존재할 수 없음에 대해 이미(적어도 이 시대에는) 논의가 끝난 문제도 있으며, 문제를 바라볼 때 문제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꼭 필요한 객관적 사고의 첫 발이라고 생각됨. 우리가 절대 시간의 존재(물론 그 이전에는 시간이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은 주인장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됨)를 의심한 아인쉬타인 같은 천재가 아니라도...


빨간그림자 08/01/27 21:52 X
<윤리란 시간과 공간에 무관한 행위규범 또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 및 메카니즘이 정성적, 정량적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기술된 행위규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윤리가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행위 규범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것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담보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위'라는 표현을 쓰지요. 심지어는 '하나의' 행위 규범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시공간을 초월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진은 '윤리'라는 것을 파악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범세계적인 질서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지역 내부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걸 찾기 위해서 중국과 한국과의 비교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일본에서 윤리라고 여겨지는 것이 한국, 중국과의 비교를 통해서 일본의 특수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고진은 그러면 지역을 넘어서서 존재할 수 있는 윤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합니다. 여기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윤리 개념을 도출하려는 시도가 있고요. 그 결과 고진이 데카르트처럼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명제를 찾아내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 타자를 고려하는 것이 윤리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려 할 때 미래의 타자(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대의 사람들), 소수자, 약자를 고려해서 행동 결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언제 기회가 되시면 이 책을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제가 중간 전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고, 읽지 않은 논의에 대한 반박을 제3자를 거쳐서 하는 것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해 보이니까요.

논외 08/01/28 09:50  R X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려 할 때 미래의 타자(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대의 사람들), 소수자, 약자를 고려해서 행동 결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인용문의 핵심은 소수자, 약자일텐데 이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의미있는-논의 가능한 명제가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렇지 안다면 이는 증명할 수 없는 또는 하기 어려운 개념의 도입으로 난제를 해결하려는 도피에 불과합니다.

"현재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 타자를 고려하는 것이 윤리이다"

고진은 현재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 타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일견 무한대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무한대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말이죠. 혹시 무한하나 경계를 가진 공간, 유한하나 경계가 없는 공간이란 표현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타자라는 개념에 촛점을 맞춘다면 고진의 타자는 구체적인지 아님 스스로를 제외한 여집합을 의미하는지,고진은 본인이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상의 한계와 경계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고찰이나 정의를 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이 또한 증명할 수 없는 또는 하기 어려운 개념의 도입으로 난제를 해결하려는 도피에 불과합니다.

'이것도 말이 되고 저것도 말이 되는 것은 내 철학의 대상에서 제외한다'-칸트

저 또한 논의의 진행을 위해 언제 기회가 되면 일독하길 권하고 싶은 책이 있지만 삼가겠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가학적인 회피나 무시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방금 알았거든요..
빨간그림자 08/01/28 16:43 X
논의 과정에서 자꾸 언어 정의가 비약이 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 현재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 타자를 고려하는 것이 윤리이다 -> 그럼 그건 일견 무한대의 대상을 지칭한다 -> 무한대란 어려운 개념이다. 이런 개념을 도입해도 되느냐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진이 '무한대'라는 개념을 논의에 끌어온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건 논외님의 해석 과정에서 도출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무한대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는 행위>에 대해 비판을 하시면 난감해집니다. 왜냐하면 고진의 정의는 <논의에 참여할 수 없었던 타자>인 것이고, 이것과 <무한대의 타자>는 굉장히 간극이 큰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논리가 비약되게 됩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다시 한번 '현재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 타자'라는 점을 얘기하게 되고요. 정치하지 못한 논의를 끌어가고 있는 쪽은 고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자꾸 논외님의 해석에서 고진과는 다른 정의가 나옵니다.

고진은 현재의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 자체를 타자의 범위로 놓습니다. 그 타자의 예시가 소수자, 약자인 것이지요. 소수자이자 약자라는 범주 내에서 타자의 정의가 나온게 아니라 그 역으로 진행된 논의입니다. 즉, 나 혹은 집단이 A라는 행동을 할 때 그 A라는 행동을 위해 의견 수렴에 참여했던 집단을 제외한 모든 여집합을 타자의 범주로 묶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서 고려하기 위해 고진은 '세계 시민'이라는 개념을 주장합니다. 맨 위의 magpie가 설명했듯이 국가를 뛰어넘고, 인종을 뛰어넘고, 시간을 뛰어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독서를 권하는 행위를 가학적인 회피나 무시로 보셨다니 유감이네요. 하지만 <특정 책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그 책을 읽지 않고서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A라는 영화를 보지 않고서 그 영화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될 때 논쟁이 피상적으로 흐르는 것처럼요. 무엇보다도 제가 책 내용을 계속 요약해서 제시해야 하는 행위를 왜 하고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책을 읽는 행위이니까요. 그 다음에 고진의 논의에 대해 토론을 하는게 보다 생산적으로 보이니까요. 이게 무례한 행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아무튼 저로서는 회피가 아닌 종결을 하고 싶습니다.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수차 지적을 했다고 생각하고, 논쟁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과 동기 부여가 당사자인 저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특정 당사자의 개인 공간에 와서 의견을 피력하고 계시다는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모든 손님에게 열려있지만, 이곳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공간이라는 점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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