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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일시: 2008년 4월 3일~ 6일
공연장소: LG 아트센터
극단: 마부 마인(Mabou Mines)
연출: 리 브루어(Lee Breuer)
- CAST -
노라 헬머: 머드 미첼(Maude Mitchell)
토어발트 헬머: 크리스토퍼 메디나(Kristopher Medina)
닐스 크록슈타르: 닉 노비치(Nic Novichi)
크리스티네 린데: 자넷 기라데우(Janet Girardeau)
랑크 박사: 리카르도 길(Ricardo Gil)
헬레네: 제시카 웨인스타인(Jessica Weinstein)
에미 헬머: 한나 크리젝(Hannah Kritzeck)
밥 헬머: Sopie Birkedlalen, Eilert Sundt
카메오 출연: Eamonn Farrell, Ilia Dodd Loomis
피아노 라이브 연주: 수잔 탕(Susan Tang)
1 . 구호가 낡게 될 때......
2005년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인형의 집>이 LG 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 2008년에 극단 마부 마인의 <인형의 집>이 공연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연출가에 의해 최신식으로 요리된 <인형의 집>을 보니 결론이 나오더군요. <인형의 집>이라는 희곡이 제게는 더 이상 매력이 없다는 것이요. 이 작품은 굉장히 노골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여성 평등 메세지를 담고 있는 희곡입니다. '메세지' 혹은 '주장' 자체가 작품을 이루는 근간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메세지가 유효하지 않는 시대가 되면 작품이 힘을 잃는 것 같아요. 아내가 더 이상 남편의 경제력에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다 보니 작품의 갈등이 와 닿지를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위선을 깨달았다고 해서 아내가 집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차라리 노라가 남편과 대판 싸운 후 다시 인형의 집에서 살아가는 게 더 많은 울림을 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은행장으로 진급한 남편에게 매우 사랑받고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의 부인인 노라는 사실 남편에게는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사유 재산을 가질 수가 없었고, 은행에 대출을 하려고 할 때는 보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몇년 전 남편이 건강이 악화되자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서 돈을 빌리고 치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대출받은 돈을 전부 갚게 되는 찰나, 서명이 위조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크록슈타트에 의해 협박을 받게 됩니다. 노라는 남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살을 해버리려고 하고요.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마구 화를 내게 되고, 크록슈타트가 협박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자 안도하며 노라에게 다정하게 대해줍니다. 노라는 남편인 토어발트가 자기가 꿈꾸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며 가출합니다.
제겐 현대 사회에서 가족을 말하고, 아내와 어머니를 말하기엔 조금 낡은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100년전에는 분명히 통용이 되는 이야기였고, 나름대로 충격을 주는 이야기였겠지만 오늘날 과연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지 충격과 인식의 전환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결혼이란 제도가 여성에게 매우 폭압적으로 작동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것이 가출을 하는 행위로 해결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 관객들은 동의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어감부터 다르죠. 가출은 무슨 가출, 차라리 이혼을 하고 말지. 과거의 노라는 아이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남편의 재정적 지원도 뿌리치면서 집 밖으로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오늘날의 노라는 다르게 행동할 것 같습니다. 아니, 다르게 행동해야만 하고요.
그러므로 연극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면 사실 거짓말. 오히려 이 낡은 작품을 연출가가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여 오늘날 관객에게도 유효할 수 있도록 만드는가에 시선이 갔습니다. 연출 테크닉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죠. 리 브루어의 연출은 흥미로웠고, 재미있었습니다. 작정하고 코믹 터치를 한 작품으로 보이더군요. 유효한 전략이 아니었나 싶어요. <인형의 집>을 드라마 그 자체로 재현한다고 했을 때 오늘날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심각하게 회의를 하는 관객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끼는 모양입니다. 작품에 매력을 느끼진 못하지만 연출의 솜씨를 보면서 '이 희곡으로 저렇게까지 나오다니. 재미있는 연출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2 . 블랙 코메디의 위트
<인형의 집>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매우 키가 작은 남자와 그에게 맞추어서 만들어진 작은 집으로 표현한 것은 꽤 위트있는 발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깜찍하고, 단란한 '인형의 집'으로 보이더군요. 노라와 크리스티네가 키가 작은 남자 배우에 비해서 체구가 압도적으로 커보이다 보니 억압적인 상황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였고요. 특히나 노라가 남편인 토어발트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단번에 들어오더군요.
제가 오스터마이어 버전의 <인형의 집>에서 불편했던 점이 노라가 자신의 성적 매력을 남편을 휘두르는 무기로 사용하는데 그게 작품 내에서 비판이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거든요. 노라란 인물 자체가 그다지 결백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점이 간과되었었습니다. 오스터마이어 버전에서는 노라가 마지막에 집을 나가는 대신 남편을 권총으로 쏴죽이는데 어이가 없어서 분노하게 되더군요. 약자로서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는 게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데 이득은 이득대로 챙기면서 구호는 구호대로 나열한다고 느꼈거든요. 그에 비해 리 브루어의 노라는 희화화 되었기에 오히려 결백합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남편 앞에서 귀여운 종달새를 연기하며, 남편의 비위를 맞추고 있습니다. 매우 키가 작은 남편 앞에서 강아지처럼 소매를 잡아 끌 때는 이 장면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풍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노라를 미워하는 게 아니예요. 단지 그녀가 완벽하게 결백한 인물은 아니라는 거, 완벽한 피해자인 것이 아니라 사실 인형의 집을 만드는 공범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으면 했던거죠. 덕분에 리 브루어의 <인형의 집>은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작품입니다.
2막의 엔딩 장면은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록슈타르의 편지로 인해서 토어발트가 진실을 알게 되고, 노라에게 마구 화를 내다가 크록슈타르의 또 다른 편지를 받고서 상황이 역전된 것을 깨닫습니다. 이때부터 연출가 특유의 터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토어발트가 노라에게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소' 운운하면서 하는 말이 독백처럼 처리됩니다. 토어발트는 작은 인형 침대에 옷을 벗고 마치 보이지 않는 노라가 밑에 깔려있는 것 마냥 섹스의 흉내를 냅니다.
그 동안 무대에는 붉은 천이 드리워지고, 가운데의 천이 걷히면 노라는 오페라 가수처럼 발코니 무대에서 노래하며 등장합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흰 드레스 차림으로요. 그리고 양 사이드의 천들이 걷히면서 그 안에 인형 남녀 부부가 나옵니다. 사진 왼쪽에 나오는 것들이 인형들입니다. 여자 인형과 함께 노라는 희곡의 대사를 노래로 칩니다. 토어발트가 노래를 하면 역시 남자 인형들이 손을 들어서 포즈를 따라하고요. 이에 노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며 아이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옷도 버리고, 마지막엔 가발도(으음?) 버린 채 떠납니다. 실 오라기 하나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의지로 느껴지더군요.
그녀는 매우 약해 보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마네킹처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떠난다는 것을 말할 때는 기계 음성이 섞여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거예요. 1막에서 남편에게 애교를 부릴 때 쓰는 콧소리와는 다르게 2막의 오페라 장면에서 그녀는 매우 저음의 보이스를 보여줍니다. 점점 더 기계음이 섞여서 그녀가 물화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요. 멀리서 본 그녀는 빼빼 마른 마네킹처럼 보였거든요. 대체 그녀가 어디를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더욱 이 장면은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에 대해 노라를 연기했던 머드 미첼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더군요.
실패, 패배, 패배...... 모든 것이 내겐 패배로 보였다. 극의 마지막에 내가 서 있는 오페라 발코니에 커튼이 내려오면 나는 거기에서 울면서 서 있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형의 집>에 완전히 빠져들어 5년을 살아온 지금은 좀 더 큰 고뇌와 도전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새롭게 되고자 하는 희망, 자기실현에의 희망이 있어야 함을 말이다. 이전에는 노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망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노라를 연기하면서 나는 좀 더 강해지고 대담해져서 이제는 그런 기회와 가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노라는 북쪽을 향하는 부둣가에 서서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또는 어느 보헤미안을 우연히 만나 파리로 발길을 돌릴 수도 있겠지. 그곳에서 무용수로 일하면서 프랑스어를 배워 유창하게 구사하고 멋진 친구들을 사귀며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성장한 여인으로서 말이다. 책을 쓸 수도 있고 그녀의 아이들과 여름을 함께 보낼 지도 모르겠다. 그 누가 알겠는가?
- 팜플렛에서 발췌
저는 사실 배우가 느꼈던 초기의 느낌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막이 내려오면 노라는 울고 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저 역시 노라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배우가 배역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희망을 불어넣고는 있지만 그렇게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 가정이 파탄나는 것이 단순히 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제도적인 모순 때문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나가겠다'라는 허풍을 오페레타로 풀어낼지언정 그녀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라라는 인물을 보는 다른 여성의 시점입니다. 즉, '노라'라는 배역에 대해서 배우가 갖고 있는 애정 자체입니다. 이 인물을 연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배우는 노라라는 여성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하고, 그녀의 삶을 지지해 주고 싶어합니다. 이 연대감 혹은 유대감은 참 흥미롭더군요. 여성이 다른 여성에 대해서 보내는 감정적 지지에 대해서 제가 유달리 애착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연출 방식으로 브레히트의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는데(음악의 사용, 극의 흐름을 깨는 피아노 연주자와 보조자의 행위들, 대사를 천 위에 프린트해서 떨어뜨리기, 무대의 설치와 철거 스탭들의 등장 등등) 그게 작품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인형의 집>이라는 고리타분한 희곡을 재미있게 연출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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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마인의 인형의 집 - 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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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어떻게 써야할지 싶어서 따로 포스팅을 하진 않았는데 저 이번 작품은 연출의 묘미정도로 만족할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참신한 주제해석도 일부 기대해봤었는데 그건 조금 아쉬웠어요. 주위에 보신 지인중에는 말미의 장면들에 꽤 당황하신 분들도 계신데, 연극제 등에서 충격적인 작품들을 만나다 보니 이젠 그저 담담해진다는~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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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의 감각과 위트로 승부한다는 점은 다들 동의하는 부분일거라 생각해요. 작품 말미의 '충격'이라는 지점도 원작에서 유래한다기 보다는 연출 스타일에 의해 되는 부분이니까. 저 역시 말미 부분이 좋았답니다. 충격까지는 모르겠지만 "호오. +.+" 이런 기분이 들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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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
메일 주소는 red_shadow@naver.com 입니다.
참, 감상평 링크 집어가겠습니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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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인형의 집'이라는 희곡에 회의적이었습니다마는(구닥다리 페미니즘 극),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터는 '인형의 집'이 달리 보입니다. 결혼 및 출산 전에는 '집 나간다고 해결이 되나?'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생각에 노라는 그걸 애초에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나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사회제도와 가정제도가 노라를 '내 몬'것이지요. 인형이 아닌, 조금이라도 자의식이 있는 여성이라면 결국 집 밖으로 내 놓는 현실이요. 저는 이제 대책없이 집을 나간 노라를 이해하고, 세상물정 모르지만 뛰쳐나간 노라에게 동병상련을 느낍니다.
좀 바뀌긴 했어도 남편의 경제력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지요. 일부일처제라는 것이 확실한 내 핏줄을 안정적으로 길러내기 위해서, 남자는 '짝짓고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굴종하기'를 시스템화 함으로써 나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구요. ㅎㅎ. 입센 남자잖아요. 이 만큼의 희곡을 쓰다니 머리 쓰다듬어주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남자가 이정도 역지사지 하기 쉬운게 아니거든요.
p.s. 여기에 대해서 다시쓰기 한 작품이 있지요. Slam the door softly라는 작품인데, 이걸 읽어보면 전 역시 인형의 집이 고전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최신성을 반영해서 썼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제 생각엔 인형의 집이 가치있어 보이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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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육아'가 들어오면 결혼의 판도가 달라지고, 여성에게 과중한 가사노동이 분담되는 것은 알지만... 남자들이 자신들이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거든요. 결국 남편이든 아내이든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싶은 욕구라는 것은 모두 존재할 텐데.... '집을 나가고 싶다'라는 삶에서 연유하는 스트레스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면 정당성이라는 것은 이보다는 강도 높게 획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현재의 여성들에겐 말이예요. 단순한 여성의 이기적인 투정이라는 말을 넘어서려면 말이죠.
가사노동과 육아 스트레스가 사실 가정 주부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영역이지만 실제 이 작품 내에서 노라는 그런 점에 스트레스 받는 인물은 아니예요. 제3자의 여분 노동력이 존재하죠. 유모와 하녀가요. 유모이자 하녀도 없이 모든 걸 감당하는 일반 여성들이라면 집이야 백만번 가출하고 싶겠지만(그땐 제목이 <인형의 집>이 아니라 <몸종의 집>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긴 해요), 그걸 거세한 상황에서의 노라라는 존재가 보여주는 행동은 쉽게 정당화되지 않아요. 100년 전이라면 재산 상속 문제라던가, 대출 문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오늘날 이런 여자가 있다고 하면 일단 다른 여자들로부터 '팔자가 좋다 못해 네가 미쳤구나'라는 얘기를 들을 것 같은 걸요.
독일 샤우뷔네에서 올린 <인형의 집>이 배경을 중산층 보보스 가정을 바꿔 놓았는데 보다 보면 노라라는 인물에 대해 화가 나요. 가사노동과 육아라는 게 여성의 패널티인 만큼 동시에 이 부분에 대해서 자유로운 여성은 더 엄격하게 무언가를 가져야만 해요. 안 그러면 여성의 이기심 외에는 다른 걸 찾기가 힘들어 지는 것 같거든요.
음..... 저는 아마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도 이 생각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마도 계속 그녀가 가사노동과 육아 노동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눈에 밟힐 것 같거든요. 그 영역에서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노라에게 억압이 존재했다면 역시 경제적인 부분과 관련된 사회 제도의 모순인데.... 이 부분이 법이 바뀌었다 보니 미묘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p.s. 좋은 작품 소개 감사~ 나중에 찾아서 읽어볼께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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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님의 글을 읽고, 제가 단 답글을 읽으며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하녀'도 '유모'도 아닌 아내는 결국 '인형'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실적으로 아내란 저 셋의 집합체이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특히 인형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인형으로서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자부하던 노라가 사실 인형은 인형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녀는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울의 추를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 남자쪽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 역시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 대체 정치적으로 올바른 포지션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가정이란 공간 내에서 과연 그런 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인지. 하긴, 본디 정치적 공정성이란 일종의 취향이라서 지키지 않아도 하등 문제가 없는 성질의 것이긴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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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빨간그림자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경제적 제도에서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현대에 노라가 있다면, 육아와 가사노동과 밥벌이에서 자유로운 여성이기 때문에 집을 나가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저도 빨간그림자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어요.
2.저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말씀 드려볼께요. '인형의 집'이 페미니스트 극의 고전으로 여전히 가치를 빛낼 수 있는 것은 외려 노라가 받고 있는 억압이 '여성이라는 것' 한가지에 국한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당시에 이 사건을 다룬 글쟁이글이 있었다면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논했을 지도 몰라요. "노라는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녀와 유모 및 평민 계층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단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인 성적 억압을‘남성 일반과의 문제’로 생각하며 가출을 감행했을 뿐이다."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을 패러디한거에요. 노라는 분명히 혜택받은 여자에요. 남편으로 부터 사랑도 받고, 잘 먹고, 잘 살고, 노동도 하지 않지요. 그녀는 그녀에게 억압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거에요. 그러다가 극 중의 사건을 통해서 (남들이 보기에 유일한 억압이라 욕할지 몰라도) 그 억압을 깨달은 거에요. 자기 자신이 진짜 부르주아 or 귀족 신분이 아니라, 부르주아 or 귀족의 '아내'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그리고 XX의 아내란 결국 노동으로 부터 배제 된다해도 하나의 온전한 인간이 아닌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전 노라의 깨달음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여자라면 깨달음을 얻기보다는 엉뚱한 곳으로 비틀어진 욕망을 투영하겠죠. 전 이것만으로도 노라에게 지지를 보내고 싶어요. 결국 빨간 그림자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듯 하지만.
3.'돈 버는 기계'와 '하녀 겸 유모 겸 인형'를 저울에 달아볼까요? 그 희생의 정도가 달라요. '돈 버는 기계'는 사회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가정에 노예인 것이지만, '하녀 겸 유모 겸 인형'은 오롯이 가정에만 속한 노예입니다. 양자의 희생의 정도는 다르지요. (물론, 소중하게 자기 일을 하는 전업주부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4.물론 빨간그림자님도 그 부분은 감안하셨겠지만, 법과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여성에게 오는 경제적 억압이 없어진 것은 아니에요. 이건 부부마다, 사람마다, case by case로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예를 들지는 못하겠지만, 암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혹은 그 밖에서도 여성은 여러가지로 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어요.
5.저도 가정이란 공간 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포지션이라는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정치적 공정성이란 일종의 취향이라서 지키지 않아도 하등 문제가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말에도 심하게 공감합니다. 저희 남편은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서의 정치적 공정성에만 관심이 있지, 가정 내의 정치적 공정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 취향인가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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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님의 코멘트를 읽고 나니깐 제게 이 희곡이 조금 더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네요. 제가 김규향의 페미니즘 비판 논리에 설득되는 사람이다 보니까 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2번과 3번 코멘트를 보고 나서 머릿속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는 것 같은 걸요. 코멘트 감사드려요. 덕분에 <인형의 집>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왜 이 작품이 그토록 사랑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요. 공연을 보고 울었던 관객들이 제법 있다는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도요.
이 희곡이 제게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는데 그건 제 내면에 노라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게 굉장히 마이너스 방향으로 가는 감정이라는 것을 방금 깨닫기는 했는데, 결혼이라는 문제가 실질적으로 다가오다 보니까 가정을 생각했을 때 이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모델이 노라의 집으로 보이는 거죠. 저 정도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아, 라는 심리.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라는 점을 너무 잘 체득하고 있어서 시스템 내에서의 최선을 선택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겠지요.
지금은 결혼 후에도 여자가 밥벌이를 하는 게 어렵지 않은 시대라 생각해요. 요즘 여성의 휴직은 결혼 때문이 아니라 출산과 관련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저에게 결혼으로 생기는 문제의 포커스는 자아실현과 사회생활의 문제가 아니라(저는 이쪽은 그리 어렵지 않게 획득된다고 보거든요)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인 거예요. 가사노동까지는 분업이 되더라고요. 요즘 제 친구들을 보면 맞벌이를 하다보니 둘 다 가사를 포기하고, 일욜에 몰아서 하더군요. 분업이 안되는 시점이 출산부터 였어요.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아기가 놀이방에 맡길 수 있을 만큼 크는 순간까지. 제게 조금 더 절실한 부분은 이쪽의 문제들이었던 거예요. 여기가 너무 절실해서 하녀와 유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요. 주변에 아둥바둥대면서 이걸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런 역할 모델들이 있기에 언젠가는 저도 그렇게 해나갈 것 같기는 한데...... 우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게 보이는 걸요. "내가 인형으로 살테니 유모와 하녀를 다오!"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심정이라니.
이러한 자신감은 제가 자아실현이나 사회 생활 쪽은 오히려 쉽게 얻어낼 수 있을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겠죠. 결혼을 해서도 어차피 나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판단이랄까.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가계가 어차피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랄까. 오히려 걸리는 것은 노라와 제가 다른 계급이라는 문제. 김규항의 지적도 옳긴 해요. 박근혜와 나는 같은 여성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문제. 여성적 유대만으로 뛰어넘기엔 좀 힘들어요. 저보다 약자를 향해서는 가능한 감정인데 강자를 향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워낙에 대한민국 사회가 거지 같아서 이 나라 내부에서야 최상위층 여성이라 할지라도 제가 결국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더군요. 그러나 아주 미묘한 지점.... 내가 싸워서 얻으려고 하는 부분이 그녀가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과 일치할 때의 느낌.
흑인 여자들은 자식들이 자꾸 팔려나가니까 자기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키우는 것이 그녀들의 페미니즘이었다고 하잖아요. 백인 여성들이 아이들에게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제가 느끼는 지점이 이 부분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녀가 떠나려는 지점을 사실 나는 들어가고 싶어해요. 내가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건 안되는 일이겠죠. 그 정도는 알지만 나가라고 등 떠밀며 박수 쳐주기엔 제 욕망이 너무 절실하죠. 이 욕망이 목구멍에서 걸려요. 굉장히 예뻐지고 싶어서 사실 다이어트를 하는데, 예쁜 몸매를 가진 애가 '난 더 이상 사회의 시선에 맞춰서 예뻐지려고 노력하며 살지 않겠어!'라고 말할 때 그걸 격려하기엔 자기 자신이 너무 분열적이잖아요. 최소한 나도 포기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해야할 것 같은데;; 그녀를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죠. 그런데 그런 격려를 하기엔 나의 욕망이 너무...... 절실하고, 급박해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이게 또 결국 사회 제도를 만들죠. 탈락해서 떨거져 나가는 누군가와 편입하는 누군가를 가르게 만들죠. 나의 욕망은 불행히도 누군가의 억압을 만들죠.
폭력 체험은 그토록 단순하고, 명쾌한데.... 그것을 통한 연대는 보다 확실한데 계급이 들어오면 복잡해지는 것 같아요. 대체 어디서 연대를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요. 얻으려고 하는 것과 버리려고 하는 것이 서로 얽혀있을 때는요. 노라는 집을 나가서 다른 집의 유모나 하녀로 취직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토어발트는 유모나 하녀 중 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할 수도 있고요. 뭔가 다른 차원으로 돌파하는 게 아니라 자리가 맞바꿔지는 것 같아요.
지금 제 생각이 어디선가 오류를 갖고 있다면 지적해 주시겠어요? 제 스스로는 돌파구를 못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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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미 라이님이 1번에 동의하신다고 얘기를 하셨네요. 저는 그 1번 문제가 너무 큰 것 같아요. ㅠ.ㅠ 제게는 2번, 3번도 결국 1번 문제인 거예요. 유모와 하녀는 어차피 계속 일을 하면서 사회와 연관을 맺고 살게 된다는 점이요. 그들은 밖에서 일도 하고 돈도 벌어요. 근데 집에 와서 아마 가사 노동을 또 할거예요. 이 놈의 가사 노동과 육아 노동. 난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왜 얘들에게 강박을 느끼고 있는 건지. 난 아기가 태어나면 남편이 미울 것 같아요. 차라리 내가 돈 벌어올테니 아기랑 24시간 있으라고 말하고 싶어질 듯.
이런 방식의 노라에 대한 지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노라가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녀가 집을 나가는 것을 격려하지만...... 결국 나는 토어발트 같은 남편을 원하는..... 거참,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 이리 둘러봐도, 저리 둘러봐도. 좋은 남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안 서 있어서 그런가 봐요. 현실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레벨이 토어발트라니. 아이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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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을 일 없는 요새, 빨간그림자님 댓글 보고 엄청 유쾌하게 웃었어요. 고민도 많이 하시고, 솔직하기도 하시고, 정말 유쾌한 분이십니다. (귓속말: 저도 노라가 부러워요. 그리고 저도 토어발트 정도면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해요. ㅎㅎ. 아니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근데 문제는 현실의 남편이란 토어발트 처럼 마누라를 귀여워하지도 않고, 토어발트처럼 돈이 많지도 않으면서도 주체성을 인정하지도 않은 남편이라는 게 문제지요)
2. 빨간그림자님은 아직 결혼도 안하셨는데, 꽤 결혼생활에 대해 통찰을 많이 갖고 계세요. 저는 결혼 전에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요. '가사'는 분담이 가능해요. 그런데 '육아'부터는 달라져요. 남자도 자신의 아이를 이뻐하고, 육아에 '나름대로 참여'하지만 그건 '아내의 일을 돕는'것에 불과해요. 책임감과 배려의 정도가 다르죠. 뭐랄까 암컷의 숙명이랄까. 강박을 느끼신다는 건 당연한 거에요. 전 결혼 및 출산 전에 그런 고민이 별로 없었다는 것에 대해 제 자신을 좀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그렇게 고민을 했다면, 결혼도 출산도 섣불리 못했을 것 같아요.)
3. 사회계층 별로, 각자의 신념 별로, 여성해방의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봐요. 리버럴리스트 페미니즘부터 프롤라테리아 페미니즘까지,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은 것이고, 그 안에서도 서로간의 비판은 있어야 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상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공존해야 할 것들이지요. 사실 저만해도 자기 분열적인 거든요. 과거 백인여성들에게는 육아에서 해방되려 하는 것이 여성해방이었다면, 흑인여성들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는게 여성해방이라는 점. 예로 들어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사례인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 다른 걱정없이 아이를 24시간 끼고 기르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육아는 힘들고 희생을 요하는 일이지만, 제 아이인걸요. 육아에서 해방하고 싶다고 해서 아이가 싫은 건 아닙니다. 내 아이와 교감하고, 내 아이와 성장해나가는 특권(특권 맞습니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끊임 없이 다시 사회로 나가길 원합니다. 아이를 기르고 가정을 꾸리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행복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이미 사회 생활의 단물 쓴물을 다 본 저로써는 이 생활이 결국 점점 더 저를 사회로부터 격리 시키고, 제 발언권은 작아지고, 제 경제권도 작아질 것이 분명하거든요. 제가 노라 같은 상황이라면, 저는 속편한 '인형'이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제 career를 쌓고, 제 자신의 사회적 position을 얻고, 명성을 얻는 일에 주력할거에요. 하지만 토어발트 같은 남편이 그것을 원할리는 없죠. 80년대에 사회 속에서 인정 받은 여성들이 '가정은 포기해라'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러고 싶지 않은거죠. 과거와 상황이 달라지고, 좀 나아졌기 때문에 둘다 욕망하게 되는거죠. 저는 "No Kid"라고 외치는 코린느 마이어도 지지하고, 홀홀 단신의 한비야도 지지하고, 공동육아를 하고자 힘쓰는 아주머니들도 지지해요. 전업주부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친구들도 지지하구요. 하지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건, '동일한 선택을 한' 남자들과는 비슷한 희생과 비슷한 권리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거든요. 저도 노라가 부럽기도 하지만, 노라의 심정에 대해서 아주 많이 공감하고 그녀를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4. 유모와 하녀도 사회의 일원이면서 가정의 일원이다. 맞아요. 그리고 빨간 그림자님이 잘 보셨듯이 노라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 유모, 아니면 단순한 하급 노동에 불과 할 겁니다. 한번도 커리어를 가져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귀족출신 여성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저는 일을 그만둔지 딱 1년 되었습니다. 남자들에게 가정생활에 신경써 줄 것을 요구하면 "회사에만 목숨 바쳐도 힘든 세상"을 탓하며 한숨을 쉽니다. 저도 거기에 동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요? 업계일이라는게 몸 담고 있을 때는 바뀌는 것 같지 않지만, 자리를 비우고 나면 휙휙 바뀌는 것입니다. 다들 목숨을 내놓고 일해도 모자랄 판에 석삼년 쉬고 복귀하기는 어려워요.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공백을 무시 못하죠. 공백을 무시한다 치더라도 어린이집에 맡긴 아이를 돌보는 것도 제 일이죠. '가정, 아이, 일'이라는 같은 조합을 선택한 남편과 나는 같은 결과를 가질 수 있을까요?
5. 저는 계급과 관련없이 '여성이기 때문에'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고, 보수의 앞잡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억압을 받는 부분이 있으며 저는 그 부분을 지지해 줄 수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가 보수를 많이 받는 정규직 숙련노동자를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자로써' 지지하고, 어렵게 사는 제 장애인 친구가 재벌가 출신 휠체어 장애인이 국회위원으로 나온다면 그를 '장애인으로써'지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건 박근혜의 정치적 노선을 지지하는 것과 (가상 존재이지만) 재벌출신 장애인 국회의원의 친재벌 정책을 지지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억압이 없는 노라가 '여성으로써 받는 억압'을 자각했을 때, 저는 그 자각에 마구마구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자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각은 가치가 없고 철이 없는 것이다'라는 김규항 식의 논리에는 절대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한 논리는 결국 '여성이 받는 억압'자체를 지워버리는 논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제 긴 의견을 가치있게 생각해 주시고, 또 의견을 구하시고 하는 것 너무 감사해요. 제 말에 귀 귀울여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막 행복할라고 그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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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님의 글을 읽고 나니 제 마음속에 꼬여서 헝클어져 있는 싵타래가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 같아요. 맞아요, 알고 있었는데...... 여성주의라는 이름이 그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던 것은 억압받는 모든 존재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 각자의 자리에서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한다는 점이었는데...... 그 넓은 포용력, 관대함,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지지. 내가 그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째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던 것인지. 자본의 논리로, 욕망의 논리로 삶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사람이 필연적으로 피폐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선가 잃어버린 감정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지지. 거대한 어머니. 내가 그걸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닮고 싶어했는데... 어째서 노라와 나를 적대적 위치에 두고, 경쟁 관계에 두고 있었는지. 그토록 자연스럽게, 그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이기심과 욕망이 모든 걸 압도하여 상대의 삶과 고민과 저항까지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니. 가슴이 아플 정도네요.
마음이 바싹 말라있었나 봐요. 세상에 부대끼다 보니 어디선가 길을 잃고 있었나봐요. 조금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서. 조금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변 그 누구도 부추기지 않았건만 홀로 마음의 욕망에 길을 잃고... 이기심에 먹히고... 심지어 사람을 재화로 보고 있고. 소중한 사람들인데...... 내 남편과 내 아이, 나는 분명 그들을 사랑할텐데. 단지 행복해지고 싶은 것 뿐인데. 노라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어서인데, 지금 그녀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던간에 단지 그녀는 행복하지 않은 거고, 그래서 집을 나오려고 하는 것인데. 내가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판하고.
마음이 길을 잃으면 무서워지네요.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말이예요.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말이예요. 욕망의 논리에 전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잘 간수해야 할 것 같아요.
오히려 엄청나게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저랍니다. 전 종종 방향 잃고 헤매고 그러거든요. 그럴 때 지켜봐주고, 일깨워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걸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저도 모르고 있던 밑바닥까지 걸어가 보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같은 곳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테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제가 한 작품을 사랑할 수 있게 문을 열어주신 점에 대해서도요.
(참, 라이님과의 코멘트 대화를 그대로 긁어서 포스팅으로 올려도 될까요? 이번에 올린 공연 리뷰에 대한 반성 겸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나름대로의 고민거리도 던져줄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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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답글 감사드립니다. 집안에 들어앉으면서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가 세상과의 소통이 하나의 패턴(비슷한 처지의 아줌마들과 가사,육아,친정,시댁,남편에 대한 수다를 떠는 것)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거든요. 이건 절대 의도적인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가능한 소통이 그것 밖에 없어서 그래요. 그래도 인터넷이 있어서, 읽은지 벌써 6~7년은 되었을 인형의 집 이야기도 하고, 이론으로 배울 때는 이해가 안 갔는데 생활로 깨달으며 익히고 있는 페미니즘 얘기도 하고, 너무 좋아요.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와 빨간 그림자님이라는 소통의 상대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빨간그림자님 마음이 바싹 마르다니요. 노노. 전 그렇게 생각 안해요. 무조건 포용의 마음으로 가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또 맞닥뜨리는 일들을 자신의 욕망으로 다시 치환해서 볼 줄 아는 시선이 여성에게 아주 중요하다 생각해요. 빨간그림자님은 포용력과 이해심, 게다가 욕망에 솔직할 줄도 아는 분 같아요. 그래서 빨간그림자님의 글을 보면어 아주 유쾌하고 즐거웠던 것이랍니다.
포스팅을 올리는 것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 저도 빨간 그림자님 덕분에 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기회를 가졌는걸요. 감사합니다.
뱀발: 아아. 공연. 공연. 언제 볼까요? 그 비싼 돈을 주고 '가위손' 공연을 보면서 '이거 이후로 한 10년은 못볼꺼야'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일 것 같아요. ^^ 그러니까 리뷰 자세하게, 많이 많이 올려 주세요~! |
| 그것만이내세상 08/04/29 1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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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를 주욱 읽다가...
[그런데 '육아'부터는 달라져요. 남자도 자신의 아이를 이뻐하고, 육아에 '나름대로 참여'하지만 그건 '아내의 일을 돕는'것에 불과해요. 책임감과 배려의 정도가 다르죠. 뭐랄까 암컷의 숙명이랄까.]
이부분이 눈에 쏘옥 들어오네요. (다른 부분은 잘 안들어온....-_-;;) 전 나름 24시간 애를 돌보며 가사와 육아에 전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남편이지만 가사는 뭐 대충 한다고 치고 육아는 전혀 틀릴 것 같은 느낌이드네요. 숙명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점이랄까
그런데 가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바꾼(보통의 돈버는 남자상에서) 아버지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이분들은 숙명을 뛰어넘은 분들인걸까요? ㅎㅎㅎ
라면서 곁다리로 헛소리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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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분인데, "24시간 애를 돌보며 가사와 육아에 전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남편"이신 이유는, 아직 가사와 육아의 실제를 모르기 때문이실 것 같아요. ^^. 전에 TV에 진짜로 애기 혼자 돌보며 (자기 엄마나 자기 누나에게 애 맞기고 돈을 대주는 것이 아닌) 키우는 어린 싱글대디들 나오더군요. 대단해 보여요. 그런데 같은 처지의 싱글맘들은 쌔고 쌨는데 그들은 존경 못 받는 거 보면, 그런 케이스의 싱글대디들이 워낙 희귀 케이스라 그런거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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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살짝 곁다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역시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런 마인드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 행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야. 분명 네가 지향하고 있는 평등과 배려라는 것을 던져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을거라 생각해. 사실 몸이 너무 피곤하니깐.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대해 신경 안 써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일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지금 발걸음으로 계속 앞으로 나가주었으면 좋겠어. 앞으로 수없이 많은 고난이 닥쳐와도 말이지. (내 주변에 요즘 출산 관련 일들이 많다보니 아아.... 아득해진다. 애 하나 태어나니까 정말 일이 많아지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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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 24시간 준비된 인간이란 것은 일단 마음가짐이란거죠 ㅋ 근데 저나 색시나 둘다 일을하기 때문에 전업주부라는 것은 할 수 없고 누군가가 지금당장 경제권을 놓아버릴수도 없기 때문에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ㅎㅎ 그리고 혼자서 번다면 "아마" 제쪽에서 벌게 될겁니다. 아마...영원히 마음만...;;
육아는 경험을 못해서 아직 알수는 없죠.솔직히 제 형쪽에서 애키우는 것만 봐도 이미 겁은 질린 상태입니다. ㅋ 뭐 그래도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해놔야죠. 스스로 암시를 꾸준히 주어야지 막상 닥치면 좀 잘하겠죠. ㅎㅎ
빨간그림자 // 당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꽤 긴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잖아. 나란 사람이 좀 약자나 그런 입장에서 이해하길 원하는 인간이라해도. 누군가 옆에서 교육을 안시켜주면 모르는거지 ㅋ 뭐 그래도 뼛속까지 골수 마초라면야 틀리겠지만. 아 그리고 가정의 영향도 있고......분담이야 정확하지만 우리집 어른들이시야. 적어도 발언권에 있어서는 평등(하기 보단 어머니가 쌔다...ㅋ)하니까 ㅎㅎ
솔직히 귀찮으면 평등이고 배려고 뭐고 색시나 나나 둘다 손놓아. ㅋ 뭐 동시에 미루니까 이것도 나름 평등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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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인터넷의 대화란 참 근사한 것이네요. 공기 중에서 사라지지 않고, 활자로 남아서 제3자에게 다시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니. 무언가 정리가 되고, 무언가를 덧붙이고 싶어지시면 그때 함께 이야기해 보기로 해요,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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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제 글이 게시판하고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공간 안에서만 어울리는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거든요. 아무튼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참여를 해봐야겠네요. 자꾸 LG아트센터 기획 공연에서 연극의 편 수가 줄어들고 있어서 슬퍼하고 있거든요. LG아트센터에서 소개하는 연극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연극 관객들이 많다는 티를 좀 내야겠어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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