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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자그마한 섬에 살고 있다. 그곳은 나와 화목한 이웃들만이 존재하는 곳이며, 인구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로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래서 내가 대세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국가적인 규모에서는 소수 의견이라는 걸 잊게 된다. 비판적 지지가 위험해지는 것은 이런 순간이다. 다수의 의견에 균형을 맞추기 위한 비판적 지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수가 아닌 소수였기에 비판적 지지는 소수가 싸우고 있는 거대 담론에 흡수된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관객에게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고 있는 공연이 있을 때, 칭찬이 너무 많으면 그것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혹은, 이미 좋은 점에 대해서 다들 공감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건설적으로 비판을 해보자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공연은 원래 마이너한 장르이고, 보는 사람이 소수이기 때문에 작품의 단점 찾기에 몰두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 대중들에게 작품이 널리 소개되는 것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성장 단계에 대한 판단 착오가 생기는 것이다. 충분히 확대되지 않았는데 확대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충분히 긍정되지 않았는데 무조건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비판적 지지가 '지지'가 아닌 '방해'로 작용하기도 한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겨우 달릴 마음을 낸 말을 때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진보 세력을 준엄하게 꾸짖는 '소위 쿨한 지성'이 왜 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런 메카니즘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객관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포지션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검열이 필요하다. 나는 섬에 살고 있어. 나는 마이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직은 충분한 자생력을 갖고 있지 않아 등등. 접하게 되는 담론의 양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균형감각을 위해서는 역시 정 반대의 의견들을 함께 접하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담론의 양을 조정하는 것은 의외로 중요한 문제이다. 담론의 물량 공세는 '세뇌'를 시키기도 하지만 '반동' 역시 만든다. 그것이 어느 쪽의 담론이든 말이다. 객관성을 조절한다는 건 아마 이 양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인 거 같다.
1: 논쟁
드디어 논의가 여기까지 이르렀다. 논객 진중권의 날카로운 필체가 힘을 얻게 되는 순간이며, 그가 가진 대중성으로 인해 담론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행이고, 즐거운 일이다. 한예종 사태와 관련된 논의가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 개인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미래문화포럼>. 정체가 모호한 이 포럼은 전국예술대학의 몇몇 교수들이 주축이 되는 단체이다. 꽤 많은 유수의 대학 교수들이 있어서 거칠게 보자면 전국의 예술대학 전체쯤 된다. S대학 음악학과의 교수 한 명이 참여한다고 해서 S대학 전체의 의견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S대학이 배제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전국에 있는 예술 대학은 한예종의 해체를 지지하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대표성의 문제는 꽤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문화포럼>을 공격할 때는 그것이 전국예술대학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는 점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한예종 vs 전국예술대학. 이 이분법은 얼마나 참혹한가. 예술계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면 예술의 이름이 참 가난하지 않은가.
아무튼 <미래문화포럼>은 한예종이 성과가 없다고 지적했고, 한예종측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반격하고 있다. <미래문화포럼>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게 맞다. <미래문화포럼>이 설정하고 있는 예술이란 세계 유수의 콩쿨에서 나타나는 순위 놀음이며, 돈을 벌어들이는 성장이다. 그리고 한예종은 그러한 결과에 대해서는 타 대학의 추종을 불허한다. <성장>이라는 모델로 파악했을 때 한예종은 독보적이다. 그러므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재단하는 <미래문화포럼>은 자기 모순, 혹은 억지를 무리고 있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볼 수도 있다. 지금 현재 국내에서 예술학교의 존립 유무로 논의되는 예술의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세계 유수의 콩쿨 순위, 대중적 지지도를 얻는 TV 연예인, 천만 관객을 넘어섰던 영화 원작인 연극. 물론, 이건 훌륭하고, 고무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갖고 싶었던 '예술'의 모습이기도 하다. 계량화된 수치들.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가난한 것들. 의외로 예술이 올림픽 경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전해준다. 아, 여기서 앞에 나왔던 이야기들이 다시 하고자 한다. 나는 저항 담론의 반대편에 서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싸우는 사람에게 힘을 보태주지는 못할 망정 반(反)의 반(反)을 행한다면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담론이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고, 여론이 힘을 실어주고 있는 때라고 생각하니 이 조그마한 섬에서 조금 더 떠드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가, 대한민국이 공유하는 예술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2: 예술 제도화
피부로 와닿는 무언가로 예술을 정의하자면 '어딘가에서 상을 타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와 시인의 등단이 그럴 것이고, 음악과 미술과 무용과 전통예술이 그렇다. 영화와 연극 같은 경우는 상을 타는 것이기도 하고, 막바로 극장에 내걸려서 관객의 호평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평가를 받는다>에 있다. 대상이 국가이든 평론가이든 개인이든 평가를 받는다. 아마추어리즘과 갈라지게 되는 것도 이 지점일 것이다. 아마추어가 자신의 만족을 이야기하며 평가를 거부할 수 있지만, 아마 예술가는 평가를 거부할 권리는 없을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좋은 상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예술은 '훌륭한 예술'이다. 이때, 꼭 동시대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사후에 재발견되어도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도 내에서 예술로서 위치를 부여받는 것이라는 논의를 '예술 제도화'라고 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25살의 무직 청년이 스케치북에 그린 낙서는 그냥 낙서이고, 같은 나이의 화가 청년이 미술관에 전시해 놓은 낙서는 왜 예술이 되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라는 위치, 작품이라는 호명, 미술관이라는 예술 장소, 그걸 예술로 감식하는 비평가와 관중, 문화예술이라는 커다란 사회 구조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예술을 판명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훌륭한 재능과 감수성이 낙서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보다 복잡한 사회 맥락이 낙서를 예술로 만든다.
제도는 예술을 만든다. 또한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 대한민국의 예술의 현주소는 예술의 제도화가 강하게 진행되는 쪽인듯 하다. '예술학교'에 맞는 이름을 가지려면 그에 맞는 제도적 결과물을 증명해야 하고, '미학교수'에 맞는 이름을 가지려면 그에 맞는 학위와 저서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증명을 요구하는 쪽이 천박하기 짝이 없다보니 예술이 자기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제도를 빌려와야만 하게 된다. 나중에 이 폐해는 감당이 되지 않을 수준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제도화가 되지 않는다면 예술이 스스로의 이름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제도화를 지지하는 쪽이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제도화가 요청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다소 서글프다. 정(正)과 반(反), 양쪽 모두가 제도화 외에는 다른 논의를 할 수 없는 가난한 논의의 장 말이다. 제도 내에서는 제도 외에는 말할 수 없기도 하다. A에 대항하기 위한 A'는 종국에는 A를 닮게 된다. 아마 이 시점에서 장(場)을 초월하는 운동의 힘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술 제도화의 문제는 간단하게 선악으로 분리할 수 없는 차원의 무엇이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제도화 역시 장점들을 갖는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교육 과정, 비슷한 실력의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는 집단 내의 선의의 경쟁, 한 단계 너머를 보게 해주는 날카로운 비평 등은 인간이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게 한다. 그럼, 현재 진행되고 있는(심지어 진행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예술 제도화의 과정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지난 10년간의 대한민국 정치는 중도 보수가 기반을 잡기 위한 투쟁과 시행 착오들이라는 지적을 읽은 적이 있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이기집단인 수구 세력과 그에 대항하여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한 부르주아적 사고를 가진 보수층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된 보수가 자리를 잡는데 이렇게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예술에서도 같은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인다. 줄타기와 밥그릇 싸움에 불과했던 이기적인 편가름에 대항하여 규칙과 성과에 의존하는 엄정한 예술 제도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싸움은 앞으로도 한참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성적'을 요구하면서 '좋은 성적'을 낸 학교를 나무라고, 통제하려는 세력을 대체 어쩌란 말인가. 예술가가 학교를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지키기 위해, 제도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를 어째야 한단 말인가. 제도의 순기능이, 원칙이 이렇게 강렬하게 부각되는 시기가 또 있을까 싶다.
3: 이분법
제도가 제도의 엄정함과 객관성을 갖게 된다면 혼란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부터 제도가 역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제도의 역기능은 순기능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다. 예술 제도화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양날의 칼을 품고 있다. 제도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없앤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똑바로 응시하는 일이 필요하다. 예술 제도화를 어떻게 봐야할까.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제도 안에 머물거나 혹은 제도 밖으로 이탈하던가.
먼저, 제도에 머물러 보자.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은 국가의 돈으로 예술을 하거나, 학교에서 예술가 지망생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끊임없이 예술을 창작해서 팔 수 있는 사람은 상위 1%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내수 시장이 작다는 것은 자동차 회사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도 적용된다. 국가에게 돈 달라고 떼쓰는 일은 쉽지도 않거니와 위계 질서가 엄격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순위가 되지 않으면 받을수도 없다. 국가는 자격을 요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도화된 성적 증명서들이 줄줄이 나오게 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제도화된 성적과 학위가 필요하다. 제도화, 제도화, 제도화. 알고 보면 예술가들은 교사 혹은 공무원. 학교와 교사의 관계는 그나마 낫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놀고 싶으니 돈 달라고 말하는 천덕꾸러기 공무원이다. 가서 돈 벌어와. 남들은 뜨거운 용광로 앞에 있고, 기계 돌리고 있잖니. 얼른 좋은 거 만들어서 해외 가서 팔어. 상위 1%가 해외에 가서 유수의 콩쿨에서 입상하고, 해외에서 판권을 사가는 영화를 만들고, 한류 드라마와 영화를 만들고 등등.
이번에는 제도 밖으로 나가보자. 미술관과 공연장을 거부하고, 예술학교를 뛰쳐 나가보자. 가난하고, 헐벗은 무직자. 직업도 없고, 비전도 없는 백수. 누군가의 소비에 기대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 밖으로 이탈한다는 것은 자본의 사슬을 끊겠다는 말 외에는 다름 아니다. 20대는 장 밖에서도 즐겁고, 재미있게 예술을 할 수 있지만 30대가 되면 슬슬 위험해진다. 40대가 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집도 없고, 직장도 없고, 결혼도 못했다. 불안한 눈동자는 사회의 구조를 파헤치는 대신 손 쉽게 사회를 탓한다. 멍청한 대중이 예술을 몰라보지, 그들은 싸구려 예술에 환호해, 기타등등. 뇌는 위에 복종한다. 예술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훨씬 쉽게 형이하학보다 비굴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집에 돈이 있는 사람만이 예술을 하는게 옳다. 그들은 굶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천박해지지 않을 것이다.
뭐가 더 있을 수 있을까? 어떤 가능성이 더 있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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