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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겐지는 이 책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이나 문학행위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가의 사회경제적 생존방식에 관해서 주로 말하고 있다. 그 생존방식은 가히 전쟁의 모습을 닮아 있다. 그의 글 속에서 그의 싸움의 모습은 일기단필의 경기병과도 같다. 그는 수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의 적은 출판사이고 출판사 편집장이다. 그의 적은 매스컴의 위력을 등에 업은 기자들이고 기자와 편집장이 작당한 연합세력이다. 그의 적은 수없이 많다. 그의 적은 자본의 조직에 복속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산업사회 전체다. 그의 적은 속물근성에 가득 찬 더러운 독자들이다. 이 독자들은 끊임없이 소설가의 포즈를 보기를 원한다. 그는 이 독자들에게 반가사유의 포즈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독자들을 쫓아버린다. 그의 적은 또 있다. 가장 무서운 적은 그 자신의 생물적 조건이다. 쌀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에게는 천만 원씩 나누어주는 은혜로운 정부도 없다. 그는 한 편의 소설을 써서 그걸로 겨우 밥을 먹으면서 그 다음 소설을 쓴다.
그의 삶 속에서, 밥과 글은 선명한 전투적 긴장관계를 이룬다. 그는 농부가 아니므로 그는 자신의 먹거리를 경작할 수가 없다. 그의 밥은, 슬프게도 글을 쓴다는 노동의 사회경제적 대가로서만 가능하다. 이 구도 안으로 수많은 적들이 내습한다. 그 적들은 출판사와 기자들과 독자들이다. 적은 그의 입으로 쳐들어오는 밥에 편승해서 쳐들어온다. 밥은 적의 수중에 있다. 그는 밥을 먹어야 글을 쓸 수 있고 밥을 먹어야 적과 싸울 수 있다. 밥은 그를 겨누는 적의 칼이다. 그리고 그 칼은 그를 둘러싼 모든 적들이 연대한 칼이다. 그 칼이 그에게 포즈를 요구한다. 그는 멀리 달아나서, 아주 조금씩만 먹는다. 그에게 밥을 많이 먹여주는 것이 적들의 전략이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 그에게 밥을 많이 먹여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적들의 전략이다. 이걸 받아먹거나 여기에 기만당하면 죽는다. 그는 자신의 몸집을 줄여서 적의 칼을 피한다.
그는 맹수의 삶의 태도를 닮아 있다. 맹수는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맹수는 늘 혼자서 어슬렁거린다. 맹수는 필요 이상의 사냥을 하지 않는다. 맹수는 먹이를 저장하지 않는다. 맹수는 그날 벌어서 그날 먹는다. 맹수는 한 번 먹은 먹이의 힘으로 그 다음 먹이를 잡는다. 맹수는 늘 주려 있다. 그 주림의 힘으로 그는 그 다음 산을 넘어간다. 그는 거대담론을 혐오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왜 글을 쓰는가 같은 질문은 모두 그에게는 공허하다. 저널리즘적인 사회정의에 바탕해서 비분강개하는 말들을 그는 혐오한다. 그는 개별적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포획하는 맹수다.
<중략> 이 일상생활은 적들과의 싸움을 일상화하는 생활이고 밥의 힘으로 또 다른 밥을 버는 생활이며 몸 속에 동물처럼 발달한 감각을 유지하는 생활이다. 포즈가 일상화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의 처절한 외로움은 복받은 외로움이고 사내다운 외로움이고 동물다운 외로움이다. - p.185~188
모든 인간은 노동 앞에서 평등하다. 예술이 성스러운 것은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매혹적이다. 19세기의 낭만주의적 신화를 걷어내고, 노동자와 예술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단숨에 무화시킨다. 노동 아래에 모든 인간은 평등해지는 것이다. 허나, 이 관점은 상업주의로 막바로 연계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많은 돈을 버는 작품이 꼭 좋은 작품은 아니지 않은가.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 꼭 품질이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근대적 노동자 예술관은 장인 정신과도 유사하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정당한 값에 팔자. 돈을 벌기 위한 글쓰기지만 돈만을 위한 글쓰기는 아니어야 하는 긴장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감돈다.
참 강인하고, 단단한 예술관이다.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예술가적 자의식보다 힘차다. 딱딱한 바위의 느낌이라고 할까. 세계 그 자체와 몸으로 부딪쳐서 살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거친 대지를 일구고 있는 농부의 느낌이랄까.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고, 사치도 없고, 과잉된 나르시즘도 없다. 실존적인 육체와 동물적인 삶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육체와 삶에 담긴 지성은 오히려 더욱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병약한 육체와 나른한 삶에 담긴 지성이 퇴폐와 허무로 귀결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독 짓는 늙은이>와 <매잡이>가 생각난다. 근대 이후의 소설가들이 장인(匠人)들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예술의 본질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전통적으로 존재해 왔으나 낭만주의 때 잠깐 정신줄을 놓았던 것일 뿐, 본질적으로 장인들인 게 아닐까. 지식인이나 예술인이 아니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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